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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_재미

쾌락과 고통-007

● 쾌락과 고통

보통 즐거움은 고통과 반대되는 내용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고통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는 형태가 있다.

그런 형태로는 가학적 행위나 피학적 행위로 고통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새디스트나 매조키스트를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고통으로 즐거움을 얻는 형태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변태적 심리상태로 보게 된다.

변태의 경우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남들이 일반적으로 싫어하고 피하는 고통을 찾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가학적 변태는 그것을 다른 이에게 가하면서 즐거움을 얻으려 하고,

피학적 변태는 반대로 자신이 이를 직접 받으면서 즐거움을 얻으려 하는 점에서 일반 경우와 다르다.

이런 변태형태는 고통을 일으키고 그 반사면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

가학적 변태의 심리과정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남의 고통은 자신은 고통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받지 않는 자신을 자신이 가하는 다른이의 고통과 대비해 좋음을 얻는다.

또 남에게 고통을 가할 때는, 다음의 심리도 작용한다.

우선 어떤 이는 다른 이를 자신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희망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가학적 행위를 통해 상대를 자의적으로 지배하는 가운데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는 즐거움을 맛본다.

이런 요소가 가학적 행위로 즐거움을 얻는 요소라고 본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통해 즐거움을 찾는 이는 남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원하게 된다.


한편 두려움도 고통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래서 많은 이가 남을두렵게 하거나 놀라게 하면서 즐거움을 얻으려 하기도 한다.


한편고통을 당하면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우는,
그 고통과 대비하여 그 고통의이전 이후의 상태를
즐거움으로 인식하는 측면이 있게 된다.
또 받은 고통이 점점 줄어들고 해소되는 측면에서도같은 효과를 갖는다.

두려움도 역시 같다.
두려움은 아직 그 고통이 현실이 아니라는 반사적 대조적 효과를 갖는다.
두려움이 해소되어 안도감을 느끼는 면도 그런 측면이다.


결국 이런 과정은 모두- 0 +의 대조효과를 통해 -를 기초로, 번갈아 0 이나 + 를 부각해 얻는 측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 한편 이런 변태적 형태는 일상생활에도들어 있다.

권력가들이 권력을 행사하여 무언가를 원하지 않는 이에게 강제하면서,
우월감이나 성취감을 느끼는 측면에는 앞의 가학적 변태의 측면이 들어 있다고 보게 된다.

또 권력가를 따르고 명령에 굴종하며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이의 심리에는
또 앞에서 본 매조키스트가 즐거움을 추구하는 측면이 들어 있다.

일반 시민들도 이런 심리의 변화는 같다.

그래서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이를 상대로 무언가를 강제하며 즐거움과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 반대로
무언가가 공포나 두려움 고통을 느끼다가그것이 해소되면,
새삼 좋음을 느끼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공포나 두려움 고통이 아예 없이 계속 지내는 상태보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난 후 그런 과정이 더 좋다고 느끼는 면도 나타난다.

○ 이런 변태의 경우도 최종적으로 즐거움을 얻으려 노력하는 점에서는

일반적 경우와 같다.

그러나 둘 다 고통을 가하고 받는 고통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으려 하는 점에서 일반적인 형태와 다르며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보게 된다.


비록 고통의 대비를 통해 반사적으로 좋음을 얻지만,
무언가 고통을 직접 느껴 그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즐거움을 얻기에 바람직스럽지 않은 것이다.

○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도 즐거움을 고통과 대비하여 느끼고 얻는 측면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일반적인 일상생활 안에도 쾌락, 즐거움을
고통을 통해 그 고통의 반사면으로 인식하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많다.

예를 들어 일상에서 늘 대하는 내용에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이도 갑자기 전쟁이나 기아, 또는 다른 이의 극심한 질병이나 사고 소식을 접하면,
지금까지 별 느낌을 갖지 못한 일상적 내용을 이와 대비시켜 보고,
자신의 상태에 새삼 고마움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런 측면은 바람직스럽지는 않지만, 좋음을 무언가 대비되는 나쁨을 통해서 인식하는 측면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도 결국 앞의 새디즘이나 매조키즘과 같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 그리고 일반적인 감각, 느낌, 인식과정에서도

서로 뚜렷이 대조되는 내용을 서로 대비하고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그 느낌이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켜 얻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심리적 현상도 관찰할 수 있다.
같은 온도의 물에 손을 넣을 때
그 보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있다가 손을 담그면 더운 물이라고 느낀다.
반대로 그 보다 뜨거운 물에 담그고 있다 담그는 경우에는 찬 물이라고 느낀다.

즉 하나의 물에 어떤 느낌과 평가를 하는가는

그것을 무엇과 대조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짐을 말한다.

어떤 것의 가치에 대해 인식할 때도 같다.

어떤 것을 고통이나 어려움을 거쳐 얻을 때
그것을 쉽게 얻은 경우보다 더 가치를 느끼는 경향도 갖는다.

그것으로 얻는 효용이 그것을 얻기 위해 치룬 희생 고통과 대비되어
더 뚜렷이 인식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부모 가운데자식에 대해 더 집착하고 애정을 갖는 쪽은
아버지보다는 출산의 고통을 겪는 어머니 쪽이 더 강하다고 한다.

사실 즐거움을 그와 반대되는 고통을 전혀 배제하고 얻어내려 하면,
즐거움 자체를 얻지 못하게 되리라 생각되기도 한다.

즐거움을 느끼려면, 그것과 대비되는 다른 고통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일반적인 상태와 새디즘 매조키즘과 같은 변태적 상태
그리고 이상적인 방향으로 추구해 나가야 할 바람직한 상태와의 구별을 서로 모호하게 만든다.

○ 그런데 이 같은 입장에서 생각하면, 우선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구별을 모호하게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좋은 일은 반사면을 통해 나쁜 것을 반대로 인식시키는 측면이 있다.

나쁜 일은 반사면을 통해 좋은 것을 반대로 인식시키는 측면을 갖는다.

이렇게 보면 결국 좋은 일과 나쁜 일도 사실 서로 같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한편, 다른 이에게 고통을 가하는 악한 행위도,

결국 그 다른이가 그 반사면을 통해 선함도 얻기 마련이라고 이해하면
선한 일과 악한 일의 구분도 함께 모호하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이상적 상태를 추구함도, 사실 무의미한 노력으로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입장에서는 아무리 이상적인 상태라 해도 다른 경우들과 같이 좋고 나쁨이 평등하게 된다고 보게되기 때문이다.

즉 +를 얻어도 결국 한편으로는 -를 얻은 것과 같고,

반대로 -를 얻어도 한편으로는 +를 얻은 것과 같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결국 어떤 좋음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별 의미없는 노력으로 보게 된다.


이는 즐거움을 얻으려면, 결국 심리적으로 그와 대비할 고통이 필요하고,

따라서 결국 마음안에서 즐거움과 고통은 함께 얻게 마련이라는 점에 주로바탕을 두게 된다.



● 그러나 과연 이들은 서로 구별할 의미가 없이 동등하다고 보아야 하는가.

만일 이들이 모두 동등하다면,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행복을 추구하거나, 더 나아가 선을 추구하는 일은 ,

고통이나 불행, 악에 머물러 있는 것과 서로 차이가 없고 따라서 결국 큰 의미없는 일이라 해야 한다.

만일 이들이 모두 어느 경우나 어차피 같다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 다 같게 취급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모두에 고통과즐거움이 함께 또는 번갈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모두가 다 같다고 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이 가운데 아무것이나 원하는 대로 선택해서 행해도 다 좋다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본다.

○ 우선 이론상 +, 0, ━ 의 평등하다는 입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이론상 ━ 를 받으면 이후 반사면을 통해 0 이나 +를 얻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그 ━ 가 해소되면서 그 해소과정을 통해 0이나 +를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바로 이런 측면에서 ━ 가 있는 경우에도 그 ━ 에 상응한 0이나 +를 얻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평등하게 된다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또는 ━ 는 적극적으로 그에 상응한 +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의 입장에서도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 이론상 어느 경우나, 즐거움, 좋음, 선이 있으면, 그와 반대되는 고통, 나쁨, 악도 대비되어 얻어지는 측면이 있다.

앞에서 그래서 이런 점에서 이들 모두를 동등한 내용으로 보는 입장도 있게 된다고 살폈다.

그런데 문제는 이는 단순한 분석이다.

━ 의 고통이 있으면 이와대조적으로 +의 좋음도 얻게 된다는 면을 너무 기계적으로 적용하려 하면,
악행,변태적행위,일상적 행위,즐거움의 추구행위,선한 행위,선하고 즐거운 행위
들의 구분이 모두 의미없게 된다.

그런데 우선 즐거움 좋음의 측면(+)를 오직 ━ 와의 대조나 대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가설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를 얻는 과정에서, ━ 를 빼더라도 0과 대조하여 +를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하나의 +와 또 다른 종류의 +를 바꿔 느낀다거나,

또 +와 대조하여 ++를 느낀다거나,

더 나아가낮은 ++와 대조하여 많고 오랜 ++++++.... 를 얻는 것도 가능하다.

━ 도 반대로 이런 방식이 가능하다.

따라서 0, +, ━ 사이에서만 이들이 늘 얻어져야 한다고 볼 수 없다.


한편, +를 ━와 대비하여 얻는 경우에도,

그 ━ 가 현실적인 내용인 경우와, 단지 관념 상에서만 얻는 비현실적인 ━ 인 경우는

그 주체가 그 ━ 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측면에서 서로 같지 않다.

한편 현실적으로 + 0 ━ 의 대조과정이 심리의 한 순간 한 과정안에 같이 들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이 가운데 무엇과 대조하여
무엇의 어떤 면을'의식의 표면에' 떠올려가며 계속 나아가는가가 구체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각 개인의 심리와 생활에서는 바로 이것이 문제된다.

개인 당사자는 ━ 를 받을 때 그와 함께 공존하는 0 이나 +이 있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개인은 반사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0 이나 +을 바라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바늘로 피부를 찌를 때 분명히 바늘로 찔러지지 않는 부분은 그에 비해 0이나 +의 상태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바늘로 피부를 찔리면, 그는 바늘이 주는 고통을 부각시켜 의식의 표면에서 얻게 되는 것이지,

그때 같이 함께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다른 측면의 0이나 +를 부각시켜 얻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론상은 그 각 순간에 ━ 와 0 +가 같이 있는 것으로 봐야하지만, 심리적으로는 그 가운데 어느 한 내용으로

부각시켜 얻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매순간의 이런 내용이 진행되어 나간다.

그 이후의 과정도 역시 같다.

심리적으로 ━ 가 있게 되면, 차후 그 ━ 가 해소되는 상태들은 그와 상대하여 0이나 +로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 를 느끼는 주체는 상대적으로 얻을 수 있는 그런 0이나 +를 의식의 표면에서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0이나 +를 인식하더라도 오히려 이를 과거의 ━ 를 부각시켜 인식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한편 한 시점이 비록 과거의 ━ 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0이나 +로 평가할 수 있더라도,

각 개인은 각 시점에서 그 과거의 ━ 와 반드시 비교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각 시점에서는 각 개인은 여러 다른 상태와 비교할 수 있다.

그래서 전체 기간면에서 ━ , 0, +가 반드시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게 된다.

특히 상대의 악행으로 ━를 받은경우, 이후 그 당사자는 상대가 가한 불쾌를 의식에 표면에 주로 갖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불쾌를 느낀 이는 다시 반대로 상대에게 불쾌를 되돌려 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 역시 보복을 받으면 그 역시 다시 보복을 하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 이후 서로 불쾌를 되갚아 주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의 ━ 가 악행으로 발생하면 서로에게 ━ 를 계속 되풀이 반복해 주고 받게 하거나,

점차 ━ 의 양과 질 기간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 0 + 가 다수 주체간에 결과적으로 평등하게 된다는 측면은
여기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의 측면도 같다.

+가 하나 선행으로 다른 이에게 발생하면 서로에게 +를 되풀이 반복해 주고 받게 되고

점차 +의 양과 질 기간이 늘어나게 된다.


이론상 ━ 가 있다면 반대면은 +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 0 +이 평등하다고 할 입장도 있다.

또 이론상으로는 ━ 는 반대로 0 이나 +가 있어야 느끼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경우가 평등하다고 볼 입장도 있다.

그러나 각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는 이론상 이처럼 평등한 내용을 매순간 얻지 않는다.

만일 어느 것이나 결과적으로 평등하다면 매 순간, 0, +, ━ 의 측면을 모두 함께 갖는 것이므로,

모든 경우 평등한 마음 내용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인 측면은 그렇지 않다. 비교에 사용되는 내용도 매순간 다르고,

매순간 마음에서 좋고 나쁨을 달리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각 개인은 각 시점에서 ━ 0 +를 달리 얻고, 전체 기간을 통해서도 ━ 0 +이 평등하게 되지는 않는다.

당사자가 의식의 표면에서 이뤄지는 내용이, 매순간 다른 내용일 뿐만 아니라, 이들 내용이 전체 기간에서 평등하게 대응되는 것도 아님을 의미한다.

삶의 전 기간을 통해 ━ 를 한 50 회 받았다면, +도 동등하게 50 회 반드시 받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즐거운 마음으로 보내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반대로 하루 종일 우울하고 슬프게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하루가 그런 것처럼 전체 삶의 기간도 이처럼 서로 다른 형태로 이뤄질 수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개인의 삶의 좋고 나쁨, 즐거움, 고통, 선과 악의 문제는 바로 이런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비록 , 이론상 즐거움, 좋음, 선이 있으면, 그와 반대되는 고통, 나쁨, 악도 대비되어 얻어질 수 있지만,

각 개인이 각 순간에 얻는 좋음과 나쁨이 차별이 있고 이것을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각 개인들이 보다 많은 다수가 보다 많고 높은 좋음을 보다 높이 오랜 기간 얻는 형태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살아가는 동안 즐거움을 추구하거나 얻는 형태는 다양하게 있다.

또 이론상 하나의 상태에 +가 있다면 0이나 ━의 상태도 상대적으로 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의 상태에 + 0 ━ 가 함께 있다고 할 때,

+ 나 0을 통해 ━를 의식의 표면에서 얻어 갖는 것보다는

━나 0을 통해 +를 의식의 표면에서 얻어 갖는 것이 낫다고 할 수 있다.

또 +도 가능하면, ━ 와의 대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0과 +의 대조를 통해서 +를 느끼는 것이 낫다.

더 나아가 +나 ++ 등의 대조로서, 점차 높은 ++, +++, ++++, +++++....를 얻어 나가는 것이 낫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도 +를 느끼는 주체를 더 많게 하고, 그 +의 양과 질과 기간이 더 늘어나는 선한 방향을 통해

개인적으로 +를 얻어 나가는 것이 낫다.

이렇게 해나갈 때, +가 갖는 긍정적인 측면이 점점 증가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유형으로는 악행,변태적행위,일상적 행위,즐거움의 추구행위,선한 행위,선하고 즐거운 행위

등 여러 형태를 나열할 수 있지만,

결국 선한 행위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앞의 유형들보다,

+를 더 많은 주체가 더 많이 높게 오래 얻을 수 있는 방안인 점에서 보다 긍정적인 방향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악행, 변태적 행위 등과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구별되는 질적 가치를 갖는 것이다.

다음에서는 이들 여러 행위유형을 그 형태면에서 차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악행 - 변태적 형태 - 일반적 형태 - 그리고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형태는

형태면에서 서로 큰 의미 차이가 있다.

○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보면 악행도 그 악행을 행하는 입장에는 그의 즐거움과 이익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범죄행위는 오로지 그 범죄자의 즐거움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와 사회전반에 고통과 손해을 가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악행은 다수의 장기간의 높은 좋음을 희생시키고, 나쁨을 가져다 주면서,

그를 통해서 그 개인만의 즐거움과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이 악행으로 평가받고 비난받게 된다.

○ 한편 변태행위 가운데, 상대에게 고통을 가하며 즐거움을 추구하는 가학적 변태행위는

그 상대의 의사에 바탕을 두지 않고 행해질 때는 기본적으로 악행이 된다.

다만, 변태행위가 아주 특수한 쌍방이 서로 동의하여 행하는 경우에는

그 범위에서만은 그래도 서로자신의 자유로운 의사를 바탕으로 변형된 형태로 각자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예외적인 경우로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비록 이런 변태행위가 고통을 적극적으로 일으켜 그를 통해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지만,

앞의 범죄행위와 약간은 차이가 있다.

○ 한편 변태적 형태와 일반적 형태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변태적 형태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새로 적극적으로 고통을 만들거나 찾고, 그것을부각시킨 다음
이의 반사면으로 즐거움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는그저 주어진 상태를 놓고, 이 보다 더 나은 것을 찾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물론 주어진 상태를 고통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또 비록 그렇다 해도, 그런 고통의 상태를 일부로 찾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주어진 상태를 바탕으로 보다 더 좋은 상태를 찾으며 살아간다.

따라서 일반적 경우는 단순히 전보다 좀 더 좋은 것을 찾으며 그것을 다른 나쁨과 비교하며 좋음을 얻는다.

일반적인 경우는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고통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즐거움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전보다 좀 더 좋은 것을 찾으며 그것을 다른 나쁨과 비교하며 좋음을 얻을 뿐이다.

이런 점을 이 둘의 기본적 차이라 할 수 있다.

○ 일반적인 형태와 바람직한 형태의 차이.

일반적인 형태에도 일부 주어진 상태를 고통으로 여기거나,

다른고통의 반사면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측면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고통 때문이다.

그래서 보다 바람직한 상태는, 즐거움을 고통을 전제로 해서 얻지 않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좋음이 나쁨과 대비하여 선명하게 얻게 되는 것이지만, 반드시 고통과 대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음은 그보다 보다 못한 좋음과도 대비할 수 있고, 또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간상태와도 비교할 수 있다.

이는 좋음은 반드시 나쁨과 대비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입장과는 다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평가의 문제에 의존하는 문제이지만,

어떤 나쁜 상태가 있어야만 좋음을 얻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주어진 상태를 좋다고 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생각하거나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런 상황은 이런 경우다.

오늘도, 친구들과 아주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내일은 또 아주 즐거운 여행을 떠난다. 이런 상태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즐거움에서 다른 즐거움으로 또는 더 나은 즐거움으로 옮겨 가는 형태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더 바람직한 상태를 생각한다면,

어떤 상태가 가능한 모든 이에게 많고 높은 좋음을 오래오래 줄 수 있는 상태를 그런 방식을 통해 즐겁게 추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즐거움에서 행하는 행위가 사회적으로도 선하고 가치 있는 경우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런 형태를 보다 더 바람직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은 상태는 다른 이들에게도 이처럼 선하게 지혜롭고 행복하게 행위해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을

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앞에서 살핀 범죄행위나 변태적 행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일부 고통을 전제로 하고 그런 고통의 반사면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측면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들 모든 경우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고통 때문이다.

우선 악행이나, 변태적 행위의 경우, 그것을 직접 행하는 당사자는 그로 인해 즐거움을 얻게는 된다.
그런데 왜 일반적인 일상의 행위보다못하다고 보게 되는가.

그것은 이들 행위에 들어있는 고통의 측면 때문에 그럴 것이다.

악행은 자신의 즐거움, 이익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고통과 손해를 적극적으로 가하는 점에서

문제된다.

비록 그런 악행으로 자신이 즐거움을 얻더라도,

자신이 고통과 손해를 준 다른 이나 사회로부터 보복을 되돌려 받게 되기 쉽다.

또 그 자신이 이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잠시의 즐거움으로 다른 이에게 많은 고통과 손해를 주고,

자신도 오랜 기간 많은 고통을 돌려 받게 되는 형태라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변태적 형태도, 대부분 혐오하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찾고 만들어낸 다음,
이를 주고 받는 과정을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는 점에서
그것을대부분 혐오스럽게 여기게 된다.



더욱이 그런 고통을 상대방이동의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를가한다면 그것은 악이며 범죄행위다.

바로 그 상대가 원하지 않는고통을 가해 받게 하고,
그 반사나 대조로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상태로 남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형태에서도 고통을 전제로 즐거움을 느끼는 측면은 역시 문제된다.

일반적인 형태에서 특히 문제되는 것은 다음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이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일으키지는 않지만,

다른 이의 고통을 보고 반사적으로 자신의 좋음을 느끼며 얻는 경우가 많다.

심리적으로는 비교적 자연스런 현상으로 볼 수 있지만 윤리적으로는 바람직 스럽지 못하다.

그리고 이런 심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습관화되면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된다.

우선 자신의 좋음을 얻기 위해 다른 이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희망하고 바라는 경향을 갖기 쉽게 된다.

일종의 새디스트 같은 심리를 갖는 것인데, 적극적으로 고통을 가하려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단지 마음에서 다른 이가 잘못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또 반대로 다른이가 잘 되는 것을 싫어하고 꺼려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심리가 더 심해지면, 적극적으로 다른 이에게 고통이나 손해가 일어나도록 노력하게 된다.

이런 마음이 악한 마음인데 그 기본은 남의 고통이나 손해를 통해 그 반사면으로

자신의 좋음을 느끼는 데에서 출발한다.

한편 다른 이의 고통을 전제로 즐거움을 얻지는 않더라도

개인적으로 주어진 상태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희망을 그리는 순간이거나 또는 희망이 실현되는 경우에만 개인적으로 좋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주로 개인적인 좋음에 머무르고 사회적인 선이 아닌 경우가 많아서,

희망을 성취한다해도 그것을 성취한 이만 개인적으로 일시적으로 작은 좋음을 얻고 머무르게 되기 쉽다.

따라서 그만큼 바람직하지 못하다.

바람직한 형태는 이의 반대가 되어야 한다.

다른이의 고통과 손해를 같이 슬퍼하는 한편,

다른 이가 선하게 이익과 즐거움을 누리면 같이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바람직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개인적인 즐거움도 선한 일을 행하는 가운데 느끼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선한 희망을 추구하는 형태도 주어진 상태 역시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상태를 향한다는 형태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선한 행위를 즐겁게 행하면, 그 과정 및 결과, 그리고 그 결과의 결과를 통해 늘 좋음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

어떤 주어진 상태와 과정의 외관은 앞에서 본 여려 경우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개인이 이에 대해 마음 상태를 달리하고 평가를 달리해 가지면,

같은 내용을 좋음으로 받아들이고 이 좋음에서 또 다른 좋음, 또는 이 좋음에서 더 좋은 상태를 추구해나갈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바람직한 형태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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