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_1105_155544_nik_exc_s12 순천 조계산 송광사
○ 2019_1106_103753_nik_fix 화순 영구산 운주사
○ 2019_1105_164812_nik_ct19_s12
[오래된 조각글재정리 안내]
☎잡담☎ = 순전한 잡담부분
● = 논의부분
재검토시작 Lab value 2565/04/22/목/23:11
♥본 페이지는 현재 작성 중인 미완성 상태의 글입니다♥
문단, 표현 재정리 작업중
경전정리 (▽정리중) (▼마침)
논의 (○정리중) (●마침)
조각글 (☆정리중) (★마침)
◆pipt9995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5/03/13/금/00:29
♥ 잡담 ♥글 정비사업-재개발계획
lab 님이
많은 부분 논의를 전개하다가
더 이상 논의를 전개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기존에 올려 놓은 글도 내용을 다듬지 않은 형태로 마냥 방치해 두고 있다.
따라서 사이트 관리자로써
재개발을 할 계획이다.
현재 글 목차제목이 있다.
이를 디스크 파일과 - 인터넷 파일이 모두 함께 연동되게 한다.
● 정신의 위치에 관한 판단착오
위 ● 부분에서 핫키를 누르면
곧바로 디스크 파일을 열게 된다.
그리고 인터넷 파일도 열어준다.
전체글을 편집하려면
이 부분을 전체 목차에서 순서를 배열하면 된다.
그런데 각 부분의 글은 또 다른 글과 연결 접속이 잘 되어야 한다.
그렇게 편집해 가야 한다.
현재 위 제목부분은 다른 문장과 동일하다.
그래서 그런 연결 기능이 있는 목차인지 명료하지 않다.
그래서 목차 기능을 하는 부분임을 알려주는 특수 기호가 부가된다.
목차에는 주로 ● 이나 ○ 기호 등이 사용된다.
다만 이 기호는 페이지 주소나 파일 제목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 정신의 위치에 관한 판단착오
● 정신의 위치에 관한 판단착오#9995
● 정신의 위치에 관한 판단착오#9995 ☞○ 서- 논의 이유
이런 다양한 방식이 연결 방식으로 유효하다.
핫키는 다음을 사용한다.
윈도우키 +Q => 디스크파일
윈도우키 + W => 인터넷 파일
윈도우키 + [ => 디스크, 인터넷 둘 다
문서정보 ori https://thegood007.tistory.com/entry/정신의-위치에-관한-판단착오#9995
03fl--정신의-위치에-관한-판단착오.txt ☞◆pipt9995
[요약내용]
정신의 위치에 관한 착오
- 정신은 육체의 사멸에 따라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 정신의 위치에 관한 착오 문제
○ 서- 논의 이유
여기에 철수가 있고 우리가 그 철수를 바라본다고 하자.
철수의 정신(마음)은 우리가 본 철수의 몸 안에 들어 있는 것일까?
또 철수의 정신(마음)은 우리가 본 철수가 죽으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일까.
정신의 위치에 관한 착오문제는 이런 문제를 살핀다.
그리고 정신의 정체를 살핀다.
더 나아가 철수, 그리고 나 자신의 정체를 살핀다.
이를 통하여, 다음을 밝힌다.
자신의 눈을 떠 일정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가운데 스스로 자신의 육체라고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정신은 이런 부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바라본 육체가 사멸하게 된다고 하자.
그런데 정신은 이에 따라 함께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
○ 논의의 효용
자신이 살면서 삶의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인과관계를 이용하여 실현해간다.
이런 과정에서 이 논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누구나 일정한 목표를 실천해간다.
그리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살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기간을 고려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만일 자신의 육체가 소멸하면 자신의 정신과 자신이 모두 사라진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이후를 고려에 넣기 힘들다.
그러나 또 그렇지 않다고 하자.
그러면 또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 자신의 생명, 목숨, 건강,
더 나아가 재산, 명예 등을 집착한다.
그런데 정신의 위치는 이와 관련해서도 중요하다.
그 모든 집착은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출발한다.
모든 애착의 중심은 자신에 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핵심은 자신의 정신이다.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려면 정신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정신의 위치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판단해야 할 내용이 많다.
- 진리에 관한 판단,
- 가치에 대한 판단,
- 목표의 설정
- 그 실현방안에 대한 판단
이런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과 착각이
삶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잘못된 형태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자신과 정신의 정체,
정신의 위치에 대해
일반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행한다.
이를 바탕으로 위 판단도 잘못 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정신은 한 생으로 육체의 사멸과 함께 그 존재를 그친다고 본다고 하자.
자신의 정신은 하나의 물질 현상에 불과하다고 여긴다고 하자.
그래서 물질[육체)의 자극 반응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여긴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의 육체의 소멸과 함께 정신도 소멸되어 버린다고 여긴다.
그러면 그는 그 기간만을 고려하고 삶에 임하게 된다. [단멸관]
또는 자신의 정신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계속 이어진다고 본다고 하자.
그래서 그 정신이 머무르는 육체의 종류(생명의 형태)가 달라져도
계속 이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또 그런 생사 과정전반을 이어 고려하고 삶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삶의 목표 설정도 달리하게 된다.
그리고 인과관계도 대단히 장구한 기간에 걸쳐 살피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의 위치와 정체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이에 관해 일반적으로 갖는 착오를 살피기 위해
그림을 그려 설명하기로 한다.
[ 참조 그림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의 문제
상식적인 판단에는 수많은 오류와 착각이 들어 있다.
이 논의는 정신작용과 관련된 논의다.
그런데 마음은 마음을 직접 보거나 만지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마음 안 내용을 언어로 가리킨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표현이 정확히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 지 글만 가지고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위와 같은 그림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그래도 위 그림이 가리키는 내용에 대해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그림으로 표시한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을 반복해보기로 한다.
그런 가운데 위 그림이 가리키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눈을 뜨면 무언가 보인다.
이처럼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한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눈을 뜨면 그 순간 나타나 얻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을 그 순간에 불잡아 둔다고 생각해보자.
이는 현실적으로 곤란한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렇게 붙잡아 둔다고 가정해보자.
그 때 그렇게 붙잡아 둔 내용이 그림 5 에 그려진 내용이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이 눈을 뜨고 감는 상황에 우선 영희나 철수가 있다.
그래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철수 '2' 가 있다.
그리고 멀리 또 다른 제 3자 영희 '3'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꽃도 하나 있다고 가정하고 그려 놓았다.
그러나 평소 대하는 하늘과 별과 구름, 세계, 우주 그런 모든 것이
위 그림에 포함될 수 있다.
여기서는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사물[그림에서 4],
마음 내용(정신)[그림에서 5, 5^],
생명체[1, 2, 3],
이렇게 나열해 표시한 것이다.
[ 참조 그림 ]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 참조 그림의 자세한 설명 ]
참조 그림에서 각 기호 숫자 등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전체 그림은 1 이라는 사람이 눈을 떴을 때 얻어낸 내용을 이처럼 그려 놓은 것이다.
위 상황에서 1 부분은 평소 자신(자신)으로 잘못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다.
자신이 눈을 떠 바라볼 때 자신의 눈이나 이마, 뒷머리, 허리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손과 발 등이 보인다.
즉, 평소 자신의 몸으로 잘못 여기는 부분 가운데 일부만을 보게 된다.
그리고 2 와 3 4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여기서 2 , 3 부분은 평소 다른 사람 철수나 영희로 잘못 여기고 대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2는 자신 옆에 가까이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4 는 꽃을 가리킨다.
이는 외부의 사물로 평소 여기는 부분을 모두 대표해 나타낸다.
이렇게 1 자신이 눈을 떠 얻게 되는 모습을 큰 사각형에 그림으로 담아 보았다.
그리고 이 내용물 전체를 담은 네모선(그릇)을 5 라고 표시해본다.
결국 5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자신이 눈을 뜰 때 얻는 내용이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얻지 못하게 되는 내용이다.
이는 즉 눈이란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낸 감각내용물 전체를 뜻한다.
이 5 안에 들어온 각 내용은 모두 1 자신의 마음 안에 들어 와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5 는 이런 각 내용물을 담은 일종의 그릇처럼 관념할 수 있다.
그래서 눈을 뜰 때 내용을 얻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정신은
시각적 감각내용물만 담는 그릇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타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의 감각내용물도 담을 수 있다.
그 외 관념적 내용(생각) 등도 담는다.
그리고 기타 잠재적인 정신 내용들도 담는다.
따라서 정신 일반은 그림 5 와 비슷하지만,
그러나 이보다는 더 큰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과 이해의 편의를 위해 시각적 감각 내용물만을 가지고 살펴나가기로 한다.
여기서는 5 로 표시된 네모 선(그릇)을 여기서 살피고자 하는 정신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자신의 정신을 5 라고 표시한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 옆에 있는 철수 2에 대해서도 이처럼 철수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을 자신의 5 와는 구별하여 5^ (= 5캐럿)으로 표시하기로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잘못된 추리를 전제로 한다.
우선 자신이 철수 2 와 대화를 나눈다고 하자.
이 때 그는 자신이 눈으로 보는 2 와 같은 부분이 철수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 부분에 2 의 정신도 위치하리라고 잘못 여긴다.
그리고 다시 그런 2의 정신 영역에 그가 눈을 떠 얻게 된 내용들이 담겨지리라 추리한다.
그래서 2 의 정신을 위 그림처럼 5^ 같은 부분에 있다고 추리해 그리게 된다.
그리고 이는 1 자신이 본 내용과 유사할 것이라고 추리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2가 눈을 떠 얻어낸 내용을 자신이 본 내용과 유사하게
1^, 2^, 3^, 4^, [^= 캐럿] 으로 표시하기로 하자.
이 때 2가 스스로 2 자신을 보게 되는 모습은
2^ 형태가 될 것이다.
즉 2 도 2 자신의 눈이나 이마, 그리고 허리 등 뒷 모습은 보지 못한다.
이는 1 이 1 자신의 눈이나 이마, 그리고 허리 등 뒷 모습은 보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차이가 있다.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 상식적으로 갖는 오류 착각의 내용들
그런데 이들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수많은 잘못된 판단과 착각을 일으킨다.
우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나열해보기로 하자.
▼ 자신과 세상의 정체에 관한 착오
우선 눈을 떠 얻는 내용 가운데 일 부분[그림에서 1]을 자신이나 자신의 몸으로 잘못 여긴다.
한편, 이런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자신이 대하는 외부 세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일정한 일부분[그림에서 2나 3]은 자신과 유사한 다른 주체 영희나 철수라고 잘못 여긴다.
▼ 대상 및 주관[감관]의 정체에 관한 착오
한편 어떤 이가 눈을 떠 어떤 부분[그림에서 4]을 보았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는 4 와 같은 부분을 눈이 상대한 외부대상으로 잘못 여긴다.
이처럼 자신이 본 내용들[그림에서 4나, 2, 3 등]을
모두 자신[ 그림 1 부분]이 상대하는 외부 대상 자체로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반대로 이런 대상을 상대하는 자신의 감관은
[그림 1 부분]에 붙어져 있는 눈이라고 잘못 여긴다.
물론 이 상황에서 눈은 눈을 직접 보지 못한다.
그렇다해도 자신이 이런 내용을 얻는 눈은 [그림 1 부분]에 붙어져 있는 그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결국 [그림에서 4]부분을 '대상'으로 하여, 자신의 눈[그림 1 에 붙어져 있는 눈]이 관계한다고 잘못 여긴다.
즉 외부대상[그림에서 4]부분과 주관[그림 1 부분]이 서로 물질적 자극- 반응의 관계를 거쳐서 내용을 얻는다고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그 결과 [그림에서 4]와 같은 모습을 얻게 된다고 잘못 여긴다.
▼ 정신과 외부물질의 구분과 정신의 위치에 관한 착오
한 주체가 눈을 떠 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이 경우 이들 내용은 자신의 육체[그림에서 1]에 주관이 위치한다고 여긴다.
즉, 자신의 정신은 자신의 육체[그림에서 1]에 위치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자신 이외의 부분은 자신의 정신을 떠나 있는 내용으로 잘못 여긴다.
그래서 [2,3,4 ] 부분들은 모두 자신 정신 밖에 있고, 정신과는 다른 성격의 외부 물질이라고 잘못 여긴다.
한편 [그림에서 1] 부분을 자신의 육체로 잘못 여긴다.
그런데 [그림에서 1] 과 같은 자신의 육체가 죽어 허물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자신의 정신도 함께 허물어져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이해한다.
▼ 다른 사람의 정신 과정과 정신의 위치에 관한 착오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잘못된 이해를 한다.
즉 2 라는 사람이 어떤 정신내용을 일으킨다고 하자.
즉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말도 하고 행위한다고 하자.
이 경우 처음 [그림에서 4]을 자신이 상대한 외부대상으로 잘못 여긴다.
그리고 [그림에서 2]부분을 또 다른 주체 철수로 잘못 여긴다.
이 때 [그림에서 2]부분이 [그림에서 4]부분이 서로 관계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래서 [그림에서 2]부분에서 자극 - 반응의 관계로 철수가 어떤 정신 내용을 얻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런 결과 2 라는 사람의 정신은
자신이 잘못 2 의 육체라고 여긴 부분 즉, [그림에서 2] 부분에 위치한다고 잘못 여긴다.
한편, 철수나 영희의 육체로 본 내용[그림에서 2나 3]이 죽어 허물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철수나 영희의 정신도 함께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 실재 내용(대상과 주체의 실재 내용)에 대한 추리의 착오
한편, 자신이 위와 같은 내용을 보았다고 하자.
그러면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의 실재내용을 다시 추리해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이 본 내용[그림 전체의 내용]과 같은 것이
실재 영역에 그대로 존재한다고 잘못 추리하게 된다.
기타 진리판단에 관해서는 이외에도 수많은 오류와 착각이 있다.
● 가설적 결론의 제시
앞에 일반적으로 잘못
판단하는 내용을 나열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와 같은 판단을 일반적으로 옳다고 잘못 여긴다.
여기서는 이런 상식적인
입장들이 왜 잘못된 판단인지를 자세히 살펴나가기로 한다.
그러나 그 근거를 제시하고 살피려면 복잡하다.
그리고
분량도 많아진다.
그래서 먼저 이런 내용 대신
옳다고 보아야 할 내용부터 먼저 간단히
밝히기로 한다.
물론 이는 앞으로 논의를 통해 밝혀야 할 부분이다.
다만 현재 상태로는 그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않고 먼저 제시한다.
그래서 현재 상태는 이를 가설적 결론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 내용들은 다음이다.
▼ 자신과 세상의 정체에 관한 착오
우선 눈을 떠 얻는 내용 가운데 일 부분[그림에서
1]을 자신이나 자신의 몸으로 잘못 여긴다.
한편, 이런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자신이 대하는 외부 세상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런 가운데 일정한 일부분[그림에서 2나 3]은 자신과 유사한 다른 주체 영희나 철수라고 잘못
여긴다
▽ 이에 대한 가설적 결론은 다음이다.
=> 자신이 자신으로 본 모습, 자신의 육체[그림에서
1]는 자신의 정신 안의 내용물이다.
그 나머지도 사정이 같다.
▼ 대상 및 주관[감관]의 정체에
관한 착오
한편 어떤 이가 눈을 떠 어떤 부분[그림에서 4]을 보았다고 하자.
이 상황에서 그는 4 와
같은 부분을 눈이 상대한 외부대상으로 잘못 여긴다.
이처럼 자신이 본 내용들[그림에서 4나, 2, 3 등]을
모두 자신[ 그림 1 부분]이 상대하는 외부 대상 자체로 잘못 이해한다.
▽ 이에 대한 가설적 결론은
다음이다.
이런 내용은 자신이 대상으로 본 내용[그림에서 4의 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즉,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는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을 얻게 해준 대상이 아니다.
다만 대상의 의미는 상대적이다.
만일 다른
관념적 내용[ 예를 들어 꽃의 모습을 보고 생각하게 된 아름다운 꽃 등의 생각]을 얻는 경우라고 하자.
이런 경우 이런 꽃의
모습[그림에서 4]를 대상으로 하여 그런 관념적 내용을 일으켜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은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을 얻게 해준 대상이 아니다.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을 얻게 하는 과정과 그 대상은
정신이 어떤 실재의 대상[#]을 상대하여 자신의 정신 안에 그런 내용을 얻게 된다고 '추리'할 수는 있다.
이런 경우 그런 실재의
대상[#]의 정체는 뒤에 다시 자세히 논의한다.
보통 이런 내용을 얻게 해준 실재의 대상[#]은
자신이 얻어 놓은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와 동일하다고 추리하기도 한다.
또는 그와 유사하다고 추리하기도 한다.
또는 적어도 그와 비례적인 관계를 갖는
어떤 내용으로 추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각 경우 그렇게 단정할 근거가 없는 사변적인 추리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런
추리를 바탕으로 그런 주장을 단정적으로 내세우면 이것도 잘못이다.
▼ 그리고 반대로 이런 대상을 상대하는 자신의
감관은
[그림 1 부분]에 붙어져 있는 눈이라고 잘못 여긴다.
물론 이 상황에서 눈은 눈을 직접 보지 못한다.
그렇다해도
자신이 이런 내용을 얻는 눈은 [그림 1 부분]에 붙어져 있는 그것이라고 잘못 여긴다.
그래서 결국 [그림에서
4]부분을 '대상'으로 하여, 자신의 눈[그림 1 에 붙어져 있는 눈]이 관계한다고 잘못 여긴다.
즉 외부대상[그림에서
4]부분과 주관[그림 1 부분]이 서로 물질적 자극- 반응의 관계를 거쳐서 내용을 얻는다고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그
결과 [그림에서 4]와 같은 모습을 얻게 된다고 잘못 여긴다.
▽ 이에 대한 가설적 결론은 다음이다.
▼ 우선 대표적으로 자신이 어떤 사물[그림에서 4]을 보았다면 이것을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 이것이 잘못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 어떤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을 대상으로 보고
또 이런 내용을 자신의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로
생각한다.
또한 이로써 자신이 물질로 이해한 내용과 자신이 정신으로 이해한 내용이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놓인다고 잘못
생각한다.
▽ 이들은 잘못된 판단이다.
이에 대한 가설적 결론은 다음이다.
=> 어떤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는 자신이나 '자신의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정신 안에 이미 얻어 놓은 정신적 결과물이다.
그리고 정신적 내용물이다.
이런 내용을 물질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이해하였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런 물질은 정신
안의 내용이다. 그리고 정신적 내용물로 이해해야 한다.
▼ 그런
가운데 자신의 정신은 자신의 육체[그림 1]이 물질적 자극- 반응의 관계를 거쳐서
내용을 얻는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은
자신의 육체[그림에서 1]에 위치하는 것이고
자신이 자신의 육체로 본 내용[그림에서 1]이 죽어 허물어지게 되면,
자신의 정신도
함께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이해한다.
- 이것도 하나의 착각이고 오류의 판단이다.
▽ 이에 대한 가설적 결론은 다음이다.
=> 자신이 자신의 모습으로 본 모습, 자신의 육체[그림에서 1]은
자신의 정신 안의 내용물이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가 아니다.
또한 자신의 정신은 자신이 육체로 본 모습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자신이 육체로
본 모습에 상응하는 실재의 육체[#]를 추리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실재의 육체[#]에 자신의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역시 '추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앞의 사물의 경우와 사정이 같다.
즉, 자신의 실재하는 육체에 대한 추리에 있어서도
그 실재하는
육체는 자신이 스스로 본 자신의 육체의 모습과 동일하거나, 유사하거나,
비례하는 어떤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만일 이렇게
추리해 생각하면 이것도 하나의 오류의 판단에 들게 된다.
한편, 자신의 정신은 오히려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이나,
자신의 육체[그림에서 1], 타인의 육체의 모습[그림에서 2,3]을
모두 그 안에 내용물로 담고 있는 전체의 그릇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위 그림에서 본다면 5 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정신이란 그릇이 거꾸로 그
안에 담긴 내용물에 머물러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한편, 이렇게 정신 안에 존재하는 모든 내용물은
정신적 내용물로써
크게 감각적 내용물[색깔,소리,냄새, 맛,촉감]과 관념적 내용물[생각, 분별, 판단..]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가 대하는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내용의 전부이고 또 현상적 내용들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의 현상적
내용을 분류해 제시할 때 이런 내용을 크게 분류해 나열하게 된다.
즉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그리고 관념적 내용들,
또는 고체, 기체, 액체, 에너지, 공간 등으로 분류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신이란 그릇에 담긴 내용물만을 분류해
넣고
이들 내용을 담는 그릇 자체는 빠뜨리기 쉽다.
즉 이들 내용물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는 요소인
정신이란
그릇[그림에서 5]을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또는 앞의 내용을 나열할 때
이들 내용을 얻게 되는 정신적
과정이나 작용을 생각하고
정신의 정체나 위치를 추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 주로 관념적 내용을 얻는 과정을 정신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들은 물질적 내용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리고 이런 물질이,
서로 반응하여 일으키는 한 변화로서 정신과정을 이해한다.
그래서 정신은 물질적 존재 즉 육체[그림에서 1]에 존재한다고
잘못 여긴다.
또 정신작용은 그런 육체의 물질적 변화과정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잘못 여기게 된다.
그러나 정신은 그런
육체[그림에서 1]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육체[그림에서 1]의 모습 및 다른 사람이나 사물 세계의 모습을
모두 그
내용물로서 그 안에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이란 그릇은
그 그릇 안의 여러 내용물과 함께
현상적 요소의 하나라고 이해해야 한다.
▼ 한편 위와 같은 내용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를 한다.
즉 2 라는 사람이 어떤 정신내용을 일으킨다면,
자신이 외부대상으로 본 내용 [그림에서 4]와 그 2라는
사람[그림에서 2]가 관계하여
그 육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관계로 이해한다.
즉 다른 사람 2 라는 사람의 정신은 자신이 본 2
의 육체[그림에서 2] 안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이것도 하나의 착각이다.
또 그런 관계로 제 3자의 육체로 본
내용[그림에서 2나 3]이 죽어 허물어지면
그 사람의 정신도 함께 사라져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 이것도 하나의
착각이다.
▽ 이에 대한 가설적 결론은 다음이다.
=> 이는 앞에서 본 자신의 관계에 대한 설명과
같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마치 다른 사람 2 와 같은 사람이 나[그림에서 1]의 정신과정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과 같다.
즉 나[그림에서 1]의 정신과정은
2 라는 사람이 바라보고 얻는 내용 가운데에서
2 라는 사람이 본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과
2 라는 사람이 본 나[1]의 모습[그림에서 1^]이 서로 관계하여
어떠한 내용을 얻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이 잘못이다.
위 서술에서 4 와 4^ 를 잘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1 과 1^ 를 잘 구분해야 한다.
1 의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주장이 잘못임을 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1 이 2 의 정신과정을 4 와
2 의 관계에서 어떤 내용을 얻는 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이 경우 이런 이해가 잘못임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런데
인과관계적 설명에서는
앞의 자신에 관한 설명과
이 다른 주체 2에 대한 설명은 조금 의미가 다르다.
인과관계의 설명은 기본적으로
현실 현상에서 얻는 내용을 가지고
현상의 내용이 나타나는 과정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는 실재의 대상과 관련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충분한 것이다.
그러나 세속의
입장에서 현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2 의 정신작용을 설명하는 하나의 현상적 설명방식으로는
다음처럼 설명하게 된다.
즉, 2 라는 사람의 정신작용이
4 라는 대상과 2 라는 주체가 서로 관계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세속적 입장에서는 적절하다고 이해하게 된다.
또 같은 이유로
2 의 정신이 2 의
육체[그림에서 2]안에 머무른다고 이해하게 된다.
이 역시 세속적 입장에서는 적절하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는 다음과는 차이가 있다.
2 의 정신이 2가 스스로 본 자신의 육체의 모습[그림에서 2^]안에
머무른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이런 이해는 잘못이다.
세속적 입장에서의 이해는, 우리가 얻을 수 있고 얻는
내용을 가지고
얻은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불완전하다.
현실 내용이 나타나게 되는 근본
바탕을 실재라고 하자.
그런데 한 주체는 이런 실재 내용을 끝내 직접 얻어낼 수 없다.
따라서 오로지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바탕으로 설명하게 되는 것은
현실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래서 정신이 어디에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세속적 현상적 설명방식으로는 앞과 같이 설명하게 된다.
즉 세속적 입장에서는 2 의 정신은 2 의
육체[그림에서 2]안에 머무른다고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2 의 정신은 2가 스스로 바라본 자신의 육체의 모습[그림에서
2^] 안에 머무른다고 표현하기는 곤란하다.
이 두 입장은 차이가 있다.
이 두 주장 사이에 [그림에서 2] 와
[그림에서 2^] 의 차이가 크다.
관찰자 1의 입장에서 보면,
2의 육체라고 표현한 부분은 2 의
정신 외부에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2 스스로 자신의 육체라고 여기게 되는 부분[그림에서 2^]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서
이런 설명방식을 관찰자인 1의 정신에 대해 적용하면 더 큰 잘못이 된다.
즉,
관찰자인 1 이 자신의 정신은
스스로 자신이 바라 본 자신의 육체[그림에서 1] 안에 존재한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이는 현상적 설명의 입장에서도 적절하지 않다.
이는 마치 2가 말하길,
2 자신의 정신[그림에서 5^]이
자신이 스스로 본 자신의 육체[ 그림에서 2^] 안에 존재한다고 이해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잘못이다.
2
자신의 정신[그림에서 5^]은
관찰자 1 이 바라볼 때의 2 의 육체[그림에서 2] 안에 존재한다고 설명한다고 하자.
그런데 이는
앞 주장과 성격이 또 다르다.
이 두 주장 사이에 [그림에서 2] 와 [그림에서 2^] 의 차이가 크다.
한편
관찰자인 1 이 자신의 정신은
스스로 자신이 바라 본 자신의 육체[그림에서 1] 안에 존재한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이는 역시
적절하지 않다.
이 경우 관찰자 자신의 정신[그림에서 5]은
오히려 자신의 육체의 모습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습을
모두 다 그 안에 포함해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고
설명해야 적절해진다.
또한 이 그릇은 눈을
떠 그런 내용물이 들어와 있던
눈을 감아서 그런 내용물이 하나도 담겨져 있지 않던 관계없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그런 것으로 관념해야
한다.
그래서 그 그릇 자체를
눈을 떠 얻은 내용물 안에서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의 정신의 현상적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런 현상적인 설명의 차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신을 내용을
담아 얻는 그릇이라고 해보자.
이 경우 육체로 여기는 부분은 그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그릇(정신)이
그 그릇에 담긴 내용물(육체)에 담겨져 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한편 육체와 정신은 평소 그 상호 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다.
평소 육체 여러 기관이 변화함에 따라, 정신 내용물도 함께 변화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고 육체의 자극 - 반응
자체를 정신자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평소 각 주체는 현실에서 얻은 내용물을 가지고 현실 내용을 설명하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한계에서 이런 세속적 이해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세속적 이해는 모두, 근본적인 오류를 갖는다.
즉 1 이 바라본 2 의 육체[그림에서 2]는 여전히 1 의 정신 안의 내용물이다.
그리고 2 의 육체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적 설명을 고집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다음 입장처럼 잘못이 된다.
예를 들어 2 라는 사람이 자신[그림에서 1]을 바라본다고 하자.
그리고 이 상황에서 1 자신의
정신은
2 가 바라본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1^] 에 존재한다고 이해한다고 하자.
이 것이 잘못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앞의 주장은 이런 주장과 마찬가지로 잘못이다.
그래서 이런 세속적 이해방식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다만 현실에서는 불가피하게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가지고 설명해나가게 된다.
그런 가운데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설명하게 된다.
따라서 정신은 육체에 머물러 존재한다고 설명하고 표현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렇다해도
정신은 육체의 물질적 반응의 과정이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육체적 눈을 뜨면 그 정신이란 그릇에 일정한
내용물이 맺혀 들어온다.
육체적 눈을 감으면 그 정신이란 그릇에 일정한 내용물이 맺히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처럼 육체기관과 정신
안 내용물은 서로 관련은 된다.
그러나 정신은 육체와 별개로 존재하는 내용이 본래 아니다.
이 정신은 그것이
얹혀지고 활동하는 근거를
매 생마다 달리하여 변화해 간다.
보통 정신이란 그릇과 그 정신이란 그릇의
내용물을 나열해 분류한다.
그리고 그 내용물을 다시 고체, 기체, 액체, 에너지, 공간 등으로 나열해 분류한다.
그리고 이들이
각기 결합과 화합 상태에 따라 그 구체적 모습은 달라진다.
그 내용이 근본 재료로서 현상적으로 계속 유지되어 나간다.
이처럼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다.
▼ 한편, 자신이 위와 같은 내용[그림에서 5안의
여러 내용]을 보았다면
그런 내용을 얻게 한 외부의 실재내용을 다시 추리해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이 본 내용[그림 전체의
내용]과 같은 것이
실재내용으로도 그대로 존재한다고 추리해 생각하게 된다.
- 이것도 하나의 오류판단이다.
▽ 이에 대한 가설적 결론은 다음이다.
=> 실재내용은 궁극적으로 끝내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다.
실재와 관련하여 무언가를 언어로 표현하고 서술하려 한다고 하자.
그러려면 그 이전에 실재의 내용을 단 하나라도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에 대해서 서술할 수 있다.
그리고 실재와 현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어떤 내용을 추리하고 판단해나갈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그 단 하나의 실재내용도 얻지 못한다.
따라서
실재내용에 대하여
그것이 있다 없다 -이다 -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하나다 여럿이다. 크다
작다. 좋다 나쁘다...등등으로
2 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다.
단지 여러가지 추리나 상상, 사변적 판단을 행하게 될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끝내 단정적으로 옳다 그르다라고 밝힐 수 없는 것이다.
인과관계에 대해 설명도 같은 한계를
갖는다.
우리가 현상에서 여러가지 내용들간에 현상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하게 된다.
그러나 이 내용은 실재의 내용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리고 실재의 내용과 관련해서도 어떤 내용을 단정하여 제시할 수 없다.
그 사정은 앞과
같다.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모두 사라진다고 하자.
그러면 실재내용만 남게 되는 것이라고
추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실재 내용은 이런 현상적 내용과 인과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 할 수 없다.
현실
내용은 실재내용을 '바탕'으로 나타난다고 하게 된다.
그렇다고 현실 내용이 실재내용과 '인과'의 관계로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사정은 역시 앞과 같다.
★★★★
[img2-49] [그림]
- 이하 아래 부분은 현재 [작성, / 표현교정, 수정, 보완/ 문단 재배치 순서 정리 등 ] 작업중입니다. -
작업시작시점 2565_0423_204402
<<<
○
착각의 이유
먼저 위에 일반적으로 착각이며 오류라고 나열한 내용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내용들이기도 하다.
이것은 착각이고 오류의 판단이지만,
그런데 이런 내용을 상식적으로 옳다고 보게 되는 데에도 나름대로 그 이유가 있다.
즉 자신이 눈을 떠 바라볼 때 사물로 보는 내용[그림에서 4나 사람 2,3 등]을
자신이 그런 내용을 얻게 된 대상 자체로
보는 것에도 나름 그 이유가 있고
또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1]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데에도
나름
이유가 있다.
▼ 우선 자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1]을 자신이라고 왜 생각하게 되는가를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자신이 눈을 떠 바라본 여러가지 모습이 위 그림처럼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여러가지 모습 가운데에서 특정한 부분[그림에서 1부분]을 자신이라고
이해하게 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경험이 작용한다.
우선 내가 발을 움직인다거나 손을 움직인다고 할 때
변화를 일으키는 부분이 그 부분들이다.
또 내가 몸을
움직여 장소를 이동해간다고 할 때
보통의 경우에는 외부 사물은 그대로인데 반해
자신이 움직일 때 따라 변화하고 움직여 나온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역시 그 특정한 부분들[그림에서 1의 부분] 이다.
즉 위 그림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자신의 몸을
움직인다고 한다면,
나머지는 대부분 그대로인데,
위 그림에서 1에 해당한 부분들만 변화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감각기관을 동원할 때도 이 착각은 옳은 것이라고 지지를 받게 된다.
즉 자신의 손으로 그림 1의
부분 가운데 한 부분(예를 들어 다리)를 만질 때는
만지는 손에도 촉각이 느껴지고
만져지는 부분(예; 다리)에도 촉각이 느껴진다.
그것은 1 이외의 부분과는 다르다.
즉 꽃을 만질 때는 다리를 만질 때와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꽃을
만진다고 생각할 때는 손에만 촉각이 느껴진다.
다리와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림에서 1의 부분을 자신
자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한편 꽃[그림에서 4]를 바라볼 때도
그렇게 자신이 본 꽃의 모습[그림에서 4]을
그 모습을 얻게 한 대상자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위 그림과 같은 상태에서
그 꽃을
손으로 붙잡아 움직여 보이지 않게 상자 속에 넣어 버린다면,
이제 꽃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꽃의 모습을
자신이 보게 되었다면,
자신이 본 그 꽃의 모습[그림에서 4]가
그 꽃의 모습을 얻게 해준 대상 자체라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감각기관을 동원하여 이를 함께 결합시켜 이해할 때도
이런 판단은 지지를 받게 된다.
예를 들어 눈으로 꽃을 만지는 과정에서
자신의 손이 꽃을 잡는 모습이 보일 때
자신은 그런 모습과 함께
그
꽃에 대한 촉감도 함께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과정을 통해
그 꽃의 모습[그림에서 4]를 대상으로 하여 자신의
손[자신의 손의 모습]이 접촉할 때,
자신의 손이 촉감을 얻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를 통해 꽃의
모습[그림에서 4]는 자신이 촉감을 얻게 되는 대상물 자체라고 이해하게 된다.
▼ 나머지 착각이나 오류판단도
사정이 같다.
자신과 상대방 [그림에서 2]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럴 때 상대방이 움직인다고
하면
이후 변화를 보이는 부분은
그림에서 2 의 부분이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그래서 그림에서 2의 부분이 그
상대방인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보면,
그 상대방이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어떤 정신작용을 일으킨다고
이해하게 된다.
즉 자신이 본 꽃의 모습[그림에서 4]를 그대로 두고
상대방[그림에서 2]에게 말을 해서
눈을
감으라고 하고 다시 눈을 뜨라고 계속 말로 지시하고
상대가 눈을 뜨고 감는 모습을 관찰하는 가운데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보고하라고 상대에게 요구한다고 하자.
그러면 상대는 눈을 뜨면 꽃이 보인다고 말하고
눈을 감으면 꽃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추리를 하게 된다.
상대방 [그림에서 2]가 눈을 감고 뜸을 반복함에 따라
꽃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고 말하는데
그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오직 상대방 뿐이다.
즉 자신이 보기에는
상대가 눈을 뜨던 감던 관계없이
꽃은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데도 상대가 눈을 감으면 꽃이 사라져 안보이게 되고,
눈을 뜨면 그 꽃이 다시 보이고 나타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 변화는 오직 상대방 자신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그 변화는 상대방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정신작용은 자신이 본 상대방[그림에서 2]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정신은 상대방의 몸[그림에서 2]안에 머무른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자신이 본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는
상대방이 그런 정신작용을 일으키게 된
대상 그 자체로 잘못
생각하게 된다.
한편 이 과정에서
그 꽃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상자 속에 집어 넣으면
그 상대방이 눈을 뜬다해도
꽃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다.
그래서 상대가 꽃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이 본 꽃의 모습[그림에서 4]를
대상으로 하여
상대방[그림에서 2]과 그의 눈이 관계하여
그런 변화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잘못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앞에서 착각과 오류의 판단이라고 제시한 내용들은
이처럼 모두 상식적으로 그런 판단을 옳은 판단이라고
받아들일만한
근거를 나름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오류와 착각의 판단을
상식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이해하고 살아가게 된다.
○ 위와 같은 대부분의 판단은 상식적으로 모두 옳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판단들이 모두 착각이고 오류라고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이런 상식적인
판단이 착각이고 잘못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도대체 무엇이 착각이고 잘못인가, 이렇게 반문하기 쉽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내용은
위의 그림에 표시한 내용과 같은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평생동안 큰 불편없이
자신의 정신이 얻어 놓은 내용물에 스스로
갇혀 살다 가기 때문이다.
위 그림에서는
눈을 통한 감각내용만 나열했지만,
귀를 통한 소리
코를 통한 냄새
혀를 통한 맛
몸을 통한 촉감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생각을 통하여 갖게 되는 여러 관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고
이들도 모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사람들이 물질과 정신을 구별해서 생각할 때
그 물질이란 단어로 생각하는 것은
위 그림에서
나열한 것과 같은
눈을 통한 감각내용[색깔]
귀를 통한 소리
코를 통한 냄새
혀를 통한 맛
몸을 통한 촉감이다.
그런데 이렇게 물질로 생각하는 것은
이들 내용 즉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이
자신의 정신 외부에 있는
내용이란 생각이 전제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본 것처럼
[그림의 1 ]만을 자신이고
자신의 몸으로 볼
때는 오히려 당연한 상식적 생각일 수 있다.
[그림의 1 ]이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육체)라고 보기 때문에,
그 외의
것은 자신 외부에 있는 물질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한편,
정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정신기관 자체와,
정신기관의 활동(정신작용),
그리고 정신기관의 활동을 통하여 얻은 내용(정신적 내용물)을 구별하여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물질과 정신의 관계를 이해할 때,
정신적 내용물은
앞에서 본 물질(색깔, 소리...)은 제외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생각하여 얻는 관념적 내용물을 주로 정신적 내용물로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정신적 내용물은
예를 들어 자신이 눈을 떠 보게 되는 꽃의 모습(색깔)은 정신적 내용물이 아니라
정신 외부의 물질적 내용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단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얻게 되는 다른 내용물
예를 들어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생각만으로 떠올리게 되는 꽃의
모습(관념적 내용)이나,
또는 사랑의 감정이나 느낌 또는 '평화'와 같은 관념적 추상적 내용을 주로 떠올려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물질의 내용을 위와 같이 이해하고
다시 그런 물질적 내용은 정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도
또 하나의 진리판단에 관련된 착각이고 오류다.
물론 철학적으로 이런 내용을 물질로 이해하지 않고
이들은 감각적 현상적
내용이라 보는 동시에,
이런 감각적 현상적 내용을 얻게 해주는 실재로서의 물질 자체를
추상적으로 추리해 설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은 실재 내용[#]으로서 물질이나,
영원불변한 실체[$]로서의 물질의 본체를
살피는
문제가 된다.
이 경우는 다시
실재 내용[#]으로서 물질이나,
영원불변한 실체[$]로서의 물질의 본체가
자신이 감각을 통해 얻는 현상적 정신내용물의 내용과
동일하다거나 또는 적어도 유사하거나 비례하는 그 무엇이라고
추리해서
단정하기 쉽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앞과는 또 다른
철학적 사변적 오류가 된다.
이런 실재내용[#]과 실체나
본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서술하기로 한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물질과 정신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한 생명이
앞의 그림으로 표시한 것과 같이
자신의 정신으로 얻는 내용물만을
그 자신이 얻을 수 있고
또 살아서 죽을 때까지 이런 내용안에
그 자신이 갇혀서 지낸다는 기본 사정에서 비롯된다.
앞에서 본 착각이나
오류가 왜 진리에 관한 판단 오류인가는
어느 부분부터 논의를 시작해도 관계가 없다고 보지만,
우선 위에 제시한 순서 가운데
첫번째 내용부터 살피기로 한다.
>>>
[ 참조 그림 ] 은 인터넷
페이지가 길어서 참조가 필요할 때 찾아 참조하기가 불편하므로 관계되는 곳에 반복해 붙이기로 한다.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 자신이 눈을 떠 얻은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가 그 모습을 얻게 한 대상 자체라는 판단의 오류문제
우선 위에 제시한 여러 상식적인 판단이 왜 오류이고
잘못인가를 밝히기 위해서는
간단한 실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중 하나의 실험은 자신이 눈을 뜨고 감고를 반복하면서
이 사이에 어떤 변화를 얻는가를 스스로 잘 관찰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과 동일 유사하다고 볼 다른 한 사람을
자신 앞에 놓고
그 역시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도록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외부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관찰자가 관찰하고
동시에 그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어떤 변화가 있는지에 대해 언어적 보고를 함께 받는 실험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가운데 그
상대방과 자신의 입장, 또는 또 다른 제 3자의 입장을
자신이 서로 번갈아 바꿔 가면서
앞에서 제시한 여러 내용들이
어떤
점에서 어떤 내용이 잘못이고 착각인가를 생각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이 관찰 실험과정에서
제 3자가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는 가운데
어떤 변화를 얻는지는 언어적 보고 외에 그 변화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이 실험과정에서
관찰자가 갖게 되는 한계의 하나다.
쉽게 말해 자신의 정신 내용은 다른 사람이 직접 얻어가질 수 없고
또 자신은 다른
사람의 정신내용을 직접 얻어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위 그림에서 다른 사람이 얻는 내용으로서
숫자 옆에 (^)을 붙여 1^
2^ 3^ 4^ 등으로 표시한 내용은
오직 그런 내용을 얻으리라고 추리해 표시한 것이며
그 내용은 그 당사자[그림에서 2] 자신
외에 직접 그 내용을 얻어 직접 확인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동일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생체 구조나 감각기관의
유사성
그리고 상호간의 언어적 대화,
또는 그 사람의 이후 행동이나 외부적 생리적 변화[뇌파나 뇌혈류의 변화 등]의 관찰
기타 사정을 통해
서로가 얻는 내용 간에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으리라고 추리할 수 있다.
그런 바탕에서,
이제 다른 제 3자 [그림에서 2나 3]이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할 때,
만일 그것이 꽃의 모습[그림에서 4^]이라고 할 때
그런 내용을 얻게 된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자신의 모습으로 본 모습[그림에서 2^]과
그 사람이 얻은 꽃의
모습[그림에서 4^]이 서로 관계하여,
그 모습을 얻게 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어떤 오류를 갖는다고 생각하는가.
관찰자 1의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설명이 갖는 오류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관찰자 1 은 2 라는 사람이
그의 마음 안에서 어떤 내용을 얻는다면,
그것은 2 라는 사람의 외부에 있는 어떤 사물[그림에서 4]와
2 라는 사람[그림에서
2]가 서로 관계하여
그런 내용을 얻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만일 이 과정을
그 2
라는 사람이 본 어떤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과
그 2 라는 사람이 본 어떤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2^]이
서로 관계하여
2 라는 사람이 어떤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면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자신에서도 같은 것이다.
자신의 경우를 생각할 때는
자신이 본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와
자신이 본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1]이
사실은
2의 입장에서
2가 본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
2가 스스로 본 자기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2^]과
그 위치의 성격이 동일함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2가 생각하는 그런 이해가
잘못이듯
자신이 본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를
그 모습을 얻게 한 대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역시 잘못인
것이다.
[ 참조 그림 ] 은 인터넷 페이지가 길어서 참조가 필요할 때 찾아 참조하기가 불편하므로 관계되는 곳에 반복해
붙이기로 한다.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 이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살피자면 다음과 같이 살필 필요가 있다.
우선 다른 사람 2 라는 사람이 눈을 감고 뜸을 반복할 때,
그가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가 보이는 것을 반복 경험하게 됨을
보고 받는다.
그런데 정확히 어떤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가 보이게 되는
것인지
관찰자 1인은 직접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1 자신도 직접 그 2 라는 사람이 하듯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1 자신도 눈을 감고 뜨고를 반복하는 가운데
눈을 감을 때 무언가 보이지 않았다가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다가 보이게 되는 것이 무엇들인가를 붙잡아 둘 필요가 있다.
만일 1 자신과 2 라는 사람이 서로 동일
유사한 감각기관을 갖고 있고,
또 동일 유사한 환경에서 실험을 하고 있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으로 보고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본다면,
2 라는 사람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그 변화는
자신이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할 때, 자신이 느낀
변화와
동일 유사한 변화라고 추정할 수 있다.
▽ 이 상태에에서 이제 그 2 라는 사람은 계속 그와 같이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게 하고
자신은 계속 눈을 뜨고 그 상황을 지켜 본다고 하자.
이 경우 그 2 라는 사람은
계속 보이다가 보이지 않는 변화가 있다고 말하지만,
1 자신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눈을 뜨고 감는 동작의 변화만 보일 뿐
그 외는
큰 변화가 없음을 관찰하게 된다.
즉 꽃[그림에서 4]를 놓고 2 라는 사람이 눈을 뜨면 꽃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꽃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1 자신의 입장에서는 2 라는 사람이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별 관계없이 계속해서 그 꽃[그림에서
4]가 일정하게 계속 보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통해 미루어 추리한다면,
2 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무언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다는 등의
변화를 보고하는 것은
그 변화가 자신이 보는 꽃[그림에서 4]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고,
상대방 2[그림에서 2]의 내부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라고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상대방
2가 보인다고 할 때 정확히 무엇이 보이고
안 보인다고 할 때는 정확히 무엇이 보였다가 안 보이게 되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 내용이 무엇인가는 앞과 같이 자신이 직접 실험을 하여
그 내용을 미루어 추정하게 된 것이다.
▽ 그래서 1 자신이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변화한 내용을
붙잡아 그것을 그림 5와 같이 표시한 다음
그
내용과 유사한 내용이 상대방 2에게 있어서도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상대방 2의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내용으로 5^으로 표시해 그려 넣은
것이다.
[ 참조 그림 ] 은 인터넷 페이지가 길어서 참조가 필요할 때 찾아 참조하기가 불편하므로 관계되는
곳에 반복해 붙이기로 한다.
https://buddhism0077.blogspot.com/2021/03/k0650-t0099-001-01.html#056 ☞○
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 이제 이런 상태에서
그 2 라는 사람 안에서 일어난 변화의
의미를 음미해보자.
만일 이 경우에 2라는 사람이 어떤 꽃의 모습[그림 4^]을 보게 되었다고 보고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 꽃의 모습[그림 4^]이라는 모습을 보게 된 것에 대해
그 2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기술하면 옳다고 볼 것인가.
즉 그 2 라는 사람이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본 내용[그림에서 2^]이
자신이 꽃이라고 생각한
내용[그림에서 4^]을 대상으로 하여,
그런 꽃의 모습[그림에서 4^]을 얻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고
기술한다면 이를 옳다고 볼 수
있는가.
관찰자 1 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잘못임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즉 만일 2 라는 사람이 그의 내부에서 꽃의
모습[그림에서 4^]을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관찰자 1이 본 꽃의 모습[그림에서 4]을
관찰자가 본 2가 상대하여 그
2의 내부에서
그런 꽃의 모습[그림에서 4^]을 얻게 된 것이라고 이해해야
옳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확히
음미하면 이것도 잘못된 해석이기는 하다.
그러나 앞의 해석보다는 더 적절하다고 보는 것이다.
즉 2 라는 사람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림에서 4^] <-> [그림에서 2^] => [그림에서 4^]
그런데 관찰자 1
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림에서 4] <-> [그림에서 2] => [그림에서 4^]
즉 ^ 표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 차이를 갖는다.
그런데 왜 이런 해석의 차이를 갖는가.
우선 2 라는 사람은 관찰자 1 이 보게 되는
[그림에서 4]와 [그림에서 2] 를 보지 못한다.
이것은
우선 2 라는 사람이 얻게 되는 정신내용 5^ 밖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내용은 사실은
관찰자 1 의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여하튼 2 라는 사람의 정신 안의 내용 5^ 안의 내용은 아니다.
그래서 2 라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이 얻은 내용만을 가지고
그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 앞에서 본 해석의 차이 가운데
비교적 적절한
것은 그래도 관찰자 1이 해석한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제 그 관찰자 1 의 해석을 가지고 이 과정을
해석하면,
2 라는 사람이 그의 정신 안에 얻는 꽃의 모습[그림에서 4^]을
그 꽃의 모습[그림에서 4^]을 얻게 한
'대상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해야 한다.
즉 그 꽃의 모습[그림에서 4^]은 대상이 아니고
단지
어떤 대상을 그 2가 상대하여 그의 정신 안에
얻어 놓은 정신적 결과물이고 정신 내용물인 것이다.
▽ 이제 앞의 해석을
그대로 가지고
자신에게 돌아와 적용해보자.
앞에서 한 해석은 그 2 에게서만 적용되는 내용은 아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관찰자 1 자신과 2 라는 사람은
동일 유사한 감각기관을 갖고 동일 유사한 환경에서
동일 유사한 정신내용을 갖는 것으로
추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서 2 라는 사람이 어떤 정신 내용물을 얻는 과정에 대한 해석은
관찰자 1이 어떤 내용을
얻는 과정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 그런 결과,
이제 2 라는 사람이 관찰자 1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이 과정을 역으로 적용해보자.
이제 자신이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변화할 때,
자신에게서는 꽃의
모습[그림에서 4]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변화를 보인다.
눈을 감아도 꽃의 모습[그림에서 4]가 그래도 여전히 남아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통해 관찰자 1 자신이 본 꽃의 모습[그림에서 4]는
사실은 2의 입장에서는 그의 내부에서 2가
얻는 정신적 내용물로서 꽃의 모습[그림에서 4^]과
그 위치와 성격이 같은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자신이 눈을 감은 상태에서 꽃의 모습[그림에서 4]가 보이지 않는 그 순간에
2 라는 다른
사람에게 여전히 꽃이 보이는가 묻는다면,
그는 자신이 눈을 감아 꽃을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와 관계없이
여전히 꽃은 보인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원래 관찰자 1 이 2 가 정신내용물을 얻는 과정에 대한 해석은
자기가 꽃의 모습[그림에서 4]라는 정신
내용물을 얻는 과정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해야 할 내용임을 미루어 알 수 있게 된다고 할 것이다.
▽ 결국
이를 통해
자신이 본 꽃의 모습[그림에서 4]는 '대상'이 아닌 것이고
그것은 다른 실재 대상을 자신이 상대하여 그 결과로서
자신의 정신에서 얻은 정신적 내용물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즉 자신이 본 꽃의 모습[그림에서 4]는 '대상'이고
또
이 대상을 자신이라고 스스로 본 육체[그림에서 2]가 상대하여
그런 내용을 얻은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앞에서 2 라는
사람에 대해서 자신이 행한 해석을
거꾸로 자신의 정신 과정에 대해서 적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이런
정신적 결과물을 얻게 한,
실재 대상[#]과 실재 주관, 주체[#]를
자신이 스스로 본 어떤 내용[그림에서 4]와
스스로
자신의 육체라고 본 내용[그림에서 2]와는 별개로
설정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
[ 참조 그림 ] 은 인터넷 페이지가 길어서 참조가 필요할 때 찾아 참조하기가 불편하므로
관계되는 곳에 반복해 붙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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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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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판단
▼ 한편, 자기 자신을 자신이 자신으로 본 모습[그림에서 1]로 생각한다.
또 상대나 제 3자도 역시 그와 같이 자신이
본 모습[그림에서 2 나 3]으로 생각한다. - 이것도 착각의 하나다.
▽ 이에 대한 가설적 결론은 다음이다.
=> 자신이 자신으로 본 모습, 자신의 육체[그림에서 1]는 앞의 사물의 모습과 같이
역시 자신의 정신 안의
내용물이다.
이는 앞의 내용에 준하므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
자신이 본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이 실재 대상이 아니듯,
자신이 본 자신의 육체의 모습[그림에서 1]도 실재의 주체 자신이 아니다.
앞에서 자신이 본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이 실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같은 방식을 적용하여
자신이 본 자신의 육체의
모습[그림에서 1]도 실재의 주체 자신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전체적으로
다른 사람 2가 얻는
내용을 놓고
이것을 자신의 경우라고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즉 다른 사람 2는 자신이 얻은 정신적 내용물을
놓고,
그 안의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을 실재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그 안의 2 자기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2^]을 실재의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보았다.
그 다른 사람 2는 그와 같은 자신의 정신 안의 내용물만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관찰자 1 이 관찰할 때는
그것은 잘못된 이해다.
그런데, 관찰자 1 의
경우에는 그런 잘못이
바로 관찰자 자기자신의 모습[그림에서 1]과
자기자신이 본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에서 발생한다.
이것을 관찰자 자신은 실재의 주체 자기자신이나,
실재의 대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이 잘못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이렇게 관찰하는 가운데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여
자신이 그 모습을 보지 않거나 보는 변화가 있을 때
다른 사람 2 도 그렇게 되는가를 물어 보면
알 수 있다.
즉 이 관계가 앞에서 관찰자 자신이
다른
사람 2 에 대해서 관찰한 관계와 같은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이를 관찰자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자신이 본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1]은
실재의 자기 자신이 아니고
자신의 정신 안에 얻은 정신내용물임을 알 수 있다.
[ 참조 그림 ] 은 인터넷 페이지가 길어서 참조가 필요할 때 찾아 참조하기가 불편하므로 관계되는 곳에 반복해
붙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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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색의 의미에 관한 논의
☞○ 진리에 관한 수많은 오류와 착각
03fl--ghpt/r1030.htm
[img2] [그림]
08pfl--image/진리의오류55.jpg
▼ 만일 다른 사람 2 의 잘못된 오류의 판단을
자신의 판단의 과정과 동일시할 수 있다면
쉽게 자신의 판단과정의 오류를 이해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 2 가
자신의 정신 안 내용물 가운데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과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2^]을
실재 사물 대상과
실재
자신 주체로 판단하고
이들이 서로 관계하여 어떤 내용을 얻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을
알았다면,
자신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와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2]를
실재 사물 대상과
실재 자신 주체로
판단하는 것이 오류임을 알 수 있다.
▼ 그런데 비록
다른 사람 2 의 앞과 같은 판단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관찰자 1 자신이 스스로 행하는 판단은 잘못이 아니라고
고집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즉
자신이
눈을 떠 얻게 된 모습
사물의 모습[그림에서 4]와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2]는
다른 사람 2의 경우와 다르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다.
그것은 다른 사람 2 의 경우는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고
눈을 뜨면 보인다고 하는 내용
즉 그 2 라는 사람이 본 꽃의 모습[그림에서 4^]과 그 2 자신의 모습의 내용[그림에서 2^]은
그 2 라는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이고
그 2 라는 사람의 정신 안의 내용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경우에 있어서
그 2 라는 사람의
정신 내용물 밖의 내용이라고 할
자신이 본 꽃의 모습[그림에서 4]
자신이 본 그 2 라는 사람의 모습[그림에서 2]
그리고
자신이 본 자기 자신의 모습 [그림에서 1]
등은 모두 그 2 라는 사람의 정신 안의 내용물이 아니고,
2 라는 사람의 정신 밖의
내용물로서
실재의 대상과 실재의 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들이 서로
관계하여,
관찰자 2 가 정신 안의 내용물을 얻는다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고
더 나아가
관찰자 1 자신이 이것들의 관계를
통해 1 자신의 정신 안의 내용물을 얻는다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한 해석이 아닌가 잘못 생각하게 된다.
이런 해석은 결국
사람 2의 경우에서 그의 내부에서 얻게 된다고 보는 전체 정신적 내용물 5^ 과
관찰자 자신이 눈을 감았다거 떠서 얻게 되는 전체 내용
5 가 서로
그 성격이 다르다고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 이럴 때는 역시, 자신이 눈을 감았다가 뜸을 반복함에
따라서
자신이 얻는 내용 5 가 전부 사라지거나 나타나는 것을 반복하는 도중에
다른 제 3자 즉 2 나 3과 같은 사람들의
경우에서도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지 질문을 던져 봄으로써
그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들 2 나 3
들이 자신처럼 같이 눈을 감았다 뜸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관찰자 1 자신이 눈을 감았다 뜸을 반복함에 따라
5 의 내용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변화를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다른 2 나 3은 그와 관계없이 일정한 내용이 계속 유지된다고 보고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간단히 말하면
자신이 눈을 감아 5 의 모습 전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이와는 관계없이 그 5 와는 별도로
그 내용들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사물을 관찰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처음
관찰자 1 이
다른 사람 2 가 눈을 떴다 감았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발견해낸 판단의 오류와 성격이 같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눈을 떠 얻은 내용은
결국 다른 사람 2 의 경우처럼
자신의 정신 안 내용물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얻어낸 정신 안 내용물 가운데
외부 사물로 본 꽃의 모습[그림에서 4]나
자기
자신으로 본 자신의 모습[그림에서 1] 역시
실재 대상이나 실재 주체 자기자신이 아니고
자신의 정신 안에 얻어진 정신적 내용물임을
알 수 있게 된다.
▼ 참고로 관찰자 1 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때는
자신의 눈이나 자신의 뒷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이 본 자신의 모습 [ 그림에서 1 ]이
실제 이런 모습을 보고 얻는 진짜 실재 자신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정신 안에 얻어 놓은 정신적 내용물로서 자신의 모습일 뿐인 것이다.
[ 현재 글 작성 중--- 계속됨 ]
/// 참고 ///
작성 도중의 글들 가운데 글 순서에 맞지 않는 작성중의 글들은
댓글란에 임시 작성해 두고
편집과정에서 본 페이지 안으로 옮겨 붙입니다.
///
Lab value
2013/10/07 22:03
위 글은 내용이 길고 복잡한 관계로
계속 부분 부분 시간을 두고 이어서 작성해나가기로
합니다.
Lab value 2013/10/08 02:39
글의 서술과정상 작성도중 잦은 수정과 변경이 이뤄짐을 양해
바랍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은 관계로 이만 줄입니다.
Lab value 2013/10/08 21:37
mun님의
지적에 따라 그림의 ' 기호 부분을 ^표로 수정하고
표현도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이후 내용은 시간을 두고 계속 이어서
작성해나가고자 합니다.
Lab value 2013/10/09 00:59
글이 길어짐에 따라 이 글도 잡담공간에서의 댓글처럼
댓글을 통해서 작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즉 잦은 수정이 이뤄져야 하고,
전체 서술 과정에서 각 부분별로 글 순서와
달리 서술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판단에 관한 착오 문제는
그 범위가 상당히 방대하여,
서술해야 할 내용이 범위가 넓은데,
하나의 페이지에 계속 이어서 서술하면
글의 수정 정리가 복잡해지게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선 댓글란을 통해 추가할 내용을 적어 나가고
최종적으로 이것을 정리하여 본 페이지에 정리내용을 올리고자 합니다.
Lab value 2013/10/09 01:16
● 실재내용을 인과관계로
관련시켜 이해할 수 없는 이유
A와 B가 서로 원인이나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려면
어떤 관계성이 상호간에 파악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우선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A가 있거나 없거나 B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에는
A는 'B의 있음'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 다른 경우로서,
A가 있거나 없거나 B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에도 A는 'B의 없음'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A와 B가 인과의 관계가 있다고 보려면,
A가 있을 때 B가 있는데,
그러나 그런 경우 A가 없으면 B가 없게 되는 관계성이
파악되어야 A의 있음과 B의 있음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성이
있다고 보게 된다.
이것을 정리하여
A가 있을때( 또는 없을 때, 또는 생겨날 때,
또는 사라질 때)
B가 있고 ( 또는 없고, 또는 생겨나고, 또는 사라지고)
그 경우에 만일
A가 없으면 ( 또는
있으면, 또는 사라지면, 또는 생겨나면)
B가 없는 ( 또는 있는, 또는 사라지는, 또는 생겨나는)
그런 상호 관계성이 파악이 되어야
이 둘은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A가 있거나 없거나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B가 그로
인하여 아무런 관계있는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A와 B는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왼 손가락을 구부려 보거나
펴보거나 한다고 하여
이 내리는 비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면,
자신이 왼 손가락을 구부리거나 펴는 행위는
이 내리는 비와는 원인
결과 관계가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실재내용은
실재내용은 현상의 본 바탕이 된다고 보는 것인데,
왜
현상과 원인 결과의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가.
특히 현상이 모두 사라지면
그 경우에는 오직 실재내용만 있게
된다고 보는 경우에도
왜 현상과 실재내용은
서로 원인 결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되는가.
이것은
실재내용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의
판단을 행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의 방식으로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내용이 못 되는 것이다.
● 실재내용을 인과관계로 관련시켜 이해할 수 없는 이유
Ω♠문서정보♠Ω
™[작성자]™ Lab
value
◑[작성일]◐ 2013-10-09-수-01-13
♨[수정내역]♨
▩[ 디스크 ]▩ [DISK] ● 실재내용을
인과관계로 관련시켜 이해할 수 없는 이유 O:/G/G/07/703-PSYC/정신의_위치에_관한_판단착오.HTM ♠● 실재내용을 인과관계로
관련시켜 이해할 수 없는 이유
ж[ 웹 ]ж [web] https://essay007.tistory.com/883 ♠● 실재내용을
인과관계로 관련시켜 이해할 수 없는 이유
⇔[ 관련문서]⇔
{!-- 관련 문서 링크--}
인터넷상의 목록
https://story007.tistory.com/829
디스크상의 목록 ●추구미작전
O:/G/G/05/eisc/eisc-catalog.htm
Ш[ 관련 문서 인용 부분 ]Ш
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Lab
value 2013/10/09 12:57
[ 작성 도중의 글 임시보관 ]
● 실재내용을 현상에서 얻는
내용과 동일하다거나,
유사하다거나, 또는 비례관계에 있다는 등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
--> 추후 논의
● 정신의 위치를 정하는 문제
정신의 위치를 정하고자 할 때
자신의 정신의 위치를 자신이 본
육체[그림에서 1]안에 정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 2의 정신의 위치를 자신이 본 2 의 육체[그림에서 2] 안에 정하는 것은 판단오류다.
우선 다른 사람 2 의 정신의 위치를 자신이 본 2 의 육체[그림에서 2] 안에 정하는 것은 판단오류인 이유는 다음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 2 가 생각하기를
관찰자 자신 1 의 정신이
2 가 관찰자 1 을 바라보고 얻는 1 의 모습,
즉 1 의 육체에
관찰자 자신의 정신이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을 옳은 판단이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관찰자
자신이 바라보아 얻은 2 의 모습에
2 의 정신이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서 그림 상에서는 마치 2
의 정신이
2 의 육체에 얹혀져 있고
그래서 5^ 으로 표시된 정신 내용물이
2 의 모습 위에 또는 머리 안에 넣어져
있다고 표시했지만,
이것은 일단 현상적 설명을 위한 표시이며
2 의 정신이 자신이 바라본 2 의 모습 위에 얹혀져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판단인 것이다.
그래서 현상적 내용에서
정신의 위치를 찾는다면
오직 관찰자 자신의
정신의 위치를
이 현상적 내용과 관련하여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결국 그림에서 나타낸 5 와 같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은 타인의 정신을 직접 관찰할 수 없기에
관찰자 자신이 자신의 정신 내용물 안에서
타인의
정신을 찾고 그 위치를 찾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자신의 정신내용물 안에 타인의 정신이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사실은 자신의 정신도 자신의 정신 내용물 외에는
명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는다.
▼ 또 하나의 판단 오류는
자신의 정신 내용물을 자신의 정신과 동일시하는 오류다.
///
▼ 자신의 정신의 위치를 자신이 본 육체[그림에서 1] 안에 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오류다.
이는 다른 사람 2 의 경우를 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만일 어떤 다른 사람 2 가 자신이 바라 본
자신의 모습 [그림에서 2^] 안에 자신의 정신이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엉터리 해석임을 관찰자 1 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자신의 경우에 적용하면,
자신의 정신의 위치를 자신이 본 육체[그림에서 1]안에 정하는
것은
앞과 동일한 오류를 자신이 범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 정신의 위치
Ω♠문서정보♠Ω
™[작성자]™ Lab value
◑[작성일]◐
2013-10-09-수-12-53
♨[수정내역]♨
▩[ 디스크 ]▩ [DISK] ● 정신의 위치
O:/G/G/07/703-PSYC/정신의_위치에_관한_판단착오.HTM ♠● 실재내용을 현상에서 얻는 내용과 동일하다거나,
ж[ 웹 ]ж
[web] https://essay007.tistory.com/883 ♠● 실재내용을 현상에서 얻는 내용과 동일하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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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Lab value 2013/10/09 13:58
[ 작성 도중의 글 임시보관 ]
●
정신이 왜 정신 내용물의 변화 파괴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된다고 볼 것인가.
관찰자 1 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신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일단 세계나 우주의 모습을 바라보고
정신 내용물로서 일정한 소리나 냄새 맛 촉감도 얻고
또 생각도 하고
기타 무의식적 반응도 일으키고 한다고 할 때
이 모든 내용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어떤 그릇을
추정할
수 있다.
만일 정신이 정신 자신을 직접 앞의 내용처럼
직접 감각하여 정신내용물로 확보할 수 있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상의 존재물들을 나열할 때,
정신의 위치를 잘못 잡고
정신을 그 현상 구성요소에서 빠뜨리는 착오를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신은 그 그릇안에 정신 내용물만을 담거나 담지 않거나 할 뿐
그 그릇이 자기
자신을 그 내용물로 담아 놓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신 안 내용물과는 달리 이 정신이란 그릇을
현상적 요소에서 빠뜨리기
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정신을 현상적 요소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가.
정신 안 내용물은 자신이 얻는데
이 내용물을 얻는 어떤 장소나 기관은
빠뜨리는 것이 적절한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비록
정신이 정신내용물만 우리에게 얻게 해주고
정신 자신은 그 내용물에서 빠진다고 하여도
우리는 이런 정신내용물을 통해서
이들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정신이란 그릇을 생각하고
또 그 위치를 잡아 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정신이란, 세계나
우주의 모습, 생각 등의 정신 안 내용물을 모두
그 안에 담고 있는 그릇처럼 생각하면 된다고 본다.
그런데 정신이나 그
위치를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은 착각을 범하기 쉽다.
즉 정신 안 내용물이 정신이란 그릇에 들어올 때만
정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은 정신 안 내용물이 전혀 없을 때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또 정신 안
내용물이 있을 때에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눈을 감으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눈을 뜨면 그 모습이 정신내용물로 담길
그 정신이란 그릇은 그릇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추정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신 안 내용물이 있을 때에도
앞과 같은 이유로 정신이란 그릇은 내용물로서 포착되지 않는다.
또 정신 안 내용물이 비워져
있을 때에도
역시 같은 이유로 정신이란 그릇은 내용물로서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 안 내용물이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계속 정신이란 그릇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 두 경우에나 언제나 그대로 포착되는 어떤 것을 찾아서
그것을 정신이라고
생각하려면
정신을 포착해내기 힘들고
정신의 위치도 잡아내기 힘들다.
여하튼 정신의 위치를 정신 안 내용물과 관계하여
추정한다면,
세계나 온 우주의 모습을 담고 있을 때
이 현상적 내용물을 모두 정신내용물로 담고 있는
어떤 그릇과 같은 것을
현상적인 정신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정신을 현상적 요소에서 빠뜨리면 안 된다고 본다.
이
정신은 그렇다고 하여 실재대상이나 실재 주체의 실재 주관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물론 실재대상이나 실재 주관을 이
정신과 관련하여
추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상적인 정신의 존재와 그 위치를
문제삼는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정신의 위치를 잡을 때
그 정신이란 그릇은
다른
정신 안 내용물과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정신 안 내용물이란 결국
관찰자 1 의 입장에서는 그 관찰자 1인이 파악해 얻어낸
모든 현상적 내용을 다 포함한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이 모든 현상적 내용을 다 비운다 해도
그 정신이란
그릇은 여전히 현상적 요소로 존재하는 것이고
또 현상적 내용이 가득차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현상적 내용물들과 함께
같이 현상적 요소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지금 문제삼는 것이
정신의 실재내용이 아니고
현상적
차원에서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상적 차원의 정신은
비록 다른 현상적 내용물과 같이
감각적 내용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허공이 직접 감각으로 파악되지 않지만,
그 현상적 존재를 인정받듯
정신이란 그릇도 현상적 존재로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이란 그릇은
앞에서와 같이
즉 눈을 감아 눈으로 얻은 모든 현상적
내용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는 다음을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관찰자 1 자신이 파악한 내용 가운데에서
어떤 부분은 그 정신의 정신 내용물의 변화에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는 부분이
있다.
즉 관찰자 1 자신이 스스로 본 1 자신의 육체 부분이다.
이 육체부분에서 눈을 감기우면 정신 안 내용물
가운데에서
색깔로 얻는 정신내용물이 모두 사라지고
또 뜨면 나타남을 경험하게 된다.
한편, 다른 신체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부분은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나
외부 사물 꽃 등과 같은 부분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 관련성을 가지고
이 육체를 자신의 정신 기관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 2의 경우를 놓고 이해하면 쉽다.
만일 2 라는 사람이
자신이 바라본 2 ^ 의 모습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 때는
그 2 자신의 정신적 내용물 5^ 의 내용이 함께 변화한다는 관계성을 파악하였다고 하여
자신이 바라 본 스스로의 모습 2^ 이 정신적 기관이라고 이해하면
오류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 관계성은
사실은
관찰자 1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와
2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바라볼 때 얻는 모습 2^ 사이에서
어떤
관계성이 있다고 보는 그런 관계와 같다.
여기서 우리는 관찰자 1 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는
2 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바라볼 때 얻는 모습 2^ 과는 달리,
2 라는 사람의 실재 주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록
관찰자 1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는
2 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바라볼 때 얻는 모습 2^ 과는 달리,
2 의 주관적 정신 내용물 밖의 내용임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2 라는 사람의 실재 주체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관찰자 1의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정신내용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여기서
우리는 관찰자 1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 나
2 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바라볼 때 얻는 모습 2^ 은
모두 2 라는
사람의 실재 내용이 모두 아니라고 이해해야 한다.
만일 2 라는 사람의 실재 내용이
우리는 관찰자 1 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 와
동일 유사하다고 받아들인다면,
이 관계의 추리는 비교적 쉬울 수 있다.
즉 2 라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건대
자신이 얻는 정신 내용물 5^ 가운데에서
일정한 부분 즉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육체라고 보게 되는 부분 즉
그림에서 2^ 의 부분이
변화하면
정신 내용물 5^ 도 변화한다는 관계성은
사실은 관찰자 1이 관찰할 때,
얻는 내용 가운데 일정한 부분
즉 관찰자 1 이 2 의 육체라고 보게 되는 부분 즉 그림에서 2 의 부분이
변화하면 그에
따라 2 의 정신내용물 5^ 이 변화하는 관계를
2 의 정신 안에서는 그와 같은 관계로 이해해 받아들이는 것으로
유추
추리할 수 있다.
즉 앞에서 관찰자 1 이 관찰하게 되는 그런 변화와
2 의 정신 내용의 변화를
2 자신은
자신이 얻는 정신 내용물 5^ 가운데에서
일정한 부분 즉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육체라고 보게 되는 부분 즉 그림에서 2^ 의
부분이
변화하면
정신 내용물 5^ 도 변화한다는 관계성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2 라는 사람의
실재 내용이
우리는 관찰자 1 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 와
동일 유사하다고 받아들인다면,
앞의 추리를
바탕으로,
실재 내용도 이런 관계성에 대한 추리 내용과
동일하거나 유사하거나 적어도 이와 비례하는
그 어떤 내용이라고
제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추리는 사실은
관찰자 1 이 관찰하는 2의 모습도
사실은 2
의 실재 내용이 아니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런 유추 추리의 근거를 잃게 된다.
또한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으며,
현상 내용과 실재 내용 사이에서는 서로 그렇게 상응관계나
비례 관계, 동일관계, 유사관계를 모두
단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추리는 다시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한편,
관찰자 1 자신이나
다른 사람 2
의 경우에나
사실은 정신이란 그릇이 놓이는
어떤 지점을 현상 안에서 찾아 제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정신이란 그릇은
현상안의 모든 내용을
그 안에 담고 있는 그릇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현상안 내용물을 다 담는 그릇의 위치를
그 그릇이 담고 있는 현상안 내용물안에서
찾아내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여하튼 우리는 현상적으로는
2 가 스스로 그 자신의 모습이라고 보는 2 ^ 의 내용이 파괴되거나 변경되면,
또는
관찰자 1 이 2 의 육체라고 보는 2 의 내용이 파괴되거나 변경되면,
또는 관찰자 1 이 자신의 육체라고 보는 1 의 내용이 파괴되거나
변경되면,
그에 따라 각각의 정신 내용물이 변화되는 관계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이 각기 파괴되면
자신의
정신이란 그릇도 파괴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체의 죽음과 정신의 소멸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상식적 믿음이다.
그러나, 앞의 관계성은 어디까지나,
실재의 관계성에 대해 현상적으로 파악해낸 관계성에
불과하다.
오히려 정신이란 그릇은
그 안의 모든 정신 안 내용물이 다 사라지고 없어져도
또 다른 구비조건만 충족되면
또 그 안에 정신 안 내용물을 채워 넣는
그릇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정신 안 내용물 가운데에서
일부의
정신 안 내용물[즉 각각의 육체]와
정신 안 내용물이 일정한 관계를 갖는 것처럼 파악되더라도
그것은 오직 정신 안 내용물을
그와 같이
얻어내는 데에서만 작용하는 관계인 것이다.
이 실험을 진행하기 위해선
다시 현상안의 존재, 즉 정신 안
내용물을 모두 다 비운 가운데
그리고 나서 정신이란 그릇은 어떻게 유지되고 변화되는가를
관찰하는 실험이 별도로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 잠정적 결론은
근본 정신은 정신이 어떤 실재적 주체 상태나, 현상적 육체와 관련하여
각 생에서
어떤 정신적 내용물을 얻고
어떤 내용을 그 자신의 육체로 파악하게 되는가와 관계없이
그 근본정신의 존재는 유지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매 생마다, 다른 생명의 형태로 바꾸어 살아가게 된다고 보는 것은
이 근본 정신이 매 생마다
다른 육체와 관련하여 정신 내용물을 얻어 갖게 되는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비록
정신을
관찰자 1 자신이 얻는 모든 정신적 내용물[=현상적 내용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고
따라서 정신의 위치를
관찰자 1
자신이 얻는 모든 정신적 내용물[=현상적 내용 전체]를 포함해 담을 수 있는
어떤 위치에 놓이는 그릇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때에도
이 정신이 그 정신 안 내용물의 변화와 큰 관계없이
그대로 이어지고 유지된다는 것은
별개의 실험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이론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현상적 내용물들의 구성요소로서
고체, 액체, 기체,
에너지, 공간 등을 나열하는 가운데
현상의 모든 모습이 변화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들 근본 재료 자체는 늘고 줆이 없이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질량 에너지 불변의 법칙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는 현상적으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또 실재내용과 관련해서는
그 내용을 역시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늘고 줆 자체도 역시
말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여하튼 현상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 근본 재료 요소는
그 구체적인 모습의
변화와 관계없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으로 관념하게 된다.
이 때 이들 현상적 요소를 모두 그 안에
담고 있는 또
하나의 현상적 요소인 정신이란 그릇도
이와 같은 사정을 갖는다고 이해해야 한다.
즉,
앞에서 현상적인 근본 재료
요소를 나열하는 과정에서
빠뜨리기 쉬운
또 다른 현상적 요소
즉 이들 현상적 내용물과 요소를 모두 그 내용물로 담게 되는
현상적 요소인
정신이란 그릇도
정신 안 내용물의 근본재료 요소가 그러하다고 보듯,
정신 안 내용물이
매 순간 변화하고 모습을 달리하고,
그 정신의 작용이 매순간 변화해가는 것과 관계없이
일정하게 계속 이어져 유지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현상적 요소를 인정할 때
현상적 범위에서는 그 근본재료들이
모두 늘고 줆이 없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것과
같은 내용인 것이다.
....
●
정신이 왜 정신 내용물의 변화 파괴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된다고 볼 것인가.
Ω♠문서정보♠Ω
™[작성자]™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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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10-09-수-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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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스크 ]▩ [DISK] ● 정신이 왜 정신
내용물의 변화 파괴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된다고 볼 것인가.O:/G/G/07/703-PSYC/정신의_위치에_관한_판단착오.HTM ♠● 정신이 왜
정신 내용물의 변화 파괴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된다고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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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ssay007.tistory.com/883 ♠● 정신이 왜 정신 내용물의 변화 파괴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된다고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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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Mun Tokyun 2013/10/09 14:31
lab님의 글을 보면서
일체 유심조라는
단어를 떠올려 봅니다.
시간이 늦게 밥을 먹으려 하는데
생각해보니 정신의 위치나 정신의 정체를 밝히는 문제는
그릇에 밥을 넣고 그릇 안의 밥 안에서만,
그 그릇을 찾아 보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원래, 밥만 볼 때는 밥만, 현상적 내용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 밥을 담은 그릇이 보이지 않더라도
밥을
현상적 내용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담긴 그릇도 현상적 내용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lab님이 제시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그 밥과 그 그릇에 대한 실재내용을
또 생각해 나가는 것인가요.
여하튼 추후 논의를 기대해봅니다.
●일체유심조
◈Lab value 2013/10/09 17:35
● 인과관계의
판단 착오
우리는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사물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다. 또는 종이에 불을
붙이면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나는 것을 관찰한다. 또는 화분을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면, 공중의 화분과는 달리 화분이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관찰한다. 또 막대기를 세개 서로 지지해 놓으면 서로를 의지하여 세울 수 있는 것도 관찰한다. 그런데 이들 모든 요소 즉 종이, 불, 연기,
재, 화분, 탁자, 막대기...등은 모두 우리가 눈을 떠서 얻거나, 귀로 대하거나...손으로 만지거나 해서 얻은 내용들이다. 또한 이들 각각은
그렇게 얻은 내용에 대해 다시 분별을 통해 관념을 세워 얻은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마음 안 내용물을 이처럼 서로 관련시켜 이해하는 방식임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은 매 순간 이전의 내용과 다른 내용이
점유하게 된다.
그래서 사실 마음을 하나의 창고처럼 이해한다면, 창고 안의 내용이 비워져야 그 안에 다른 내용이 들어가게 되는 것처럼,
마음 안의 내용도 앞 내용이 마음에서 자리를 비켜 줘야 그 다음 내용이 차지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따.
앞에서도 무엇을
대상으로 우리가 대하여 앞과 같은 마음안의 여러 내용을 얻었는지가 의문시 된다. 우리가 실재로 상대한 실재 대상의 내용은 무엇이고 또 이것과
실재로 상대한 실재의 주체와 주관 실재의 정신은 어떤 것일까. 이런 것도 의문이 된다.
그런데 이 실재내용은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오로지 마음 안에 얻은 정신 내용물만을 가지고 현상내 여러 현상 즉 없다가 무엇이 나타나는 경우, 왜 그것이 나타나는가. 또는
무엇이 있다가 왜 그것이 사라지는가. 또는 무엇이 없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이것은 있는가. 또는 무엇이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이것은 없는가.
등의 여러 의문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 때 그 답을 현상안에서 이미 얻어 놓은 다른 내용물과 관련시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A가 있을 때 (,나타날 때, 없을 때, 사라질 때) B가 있고 (나타나고, 없고, 사라지고)그 상황에서 그 A가
없다면, (,사라진다면, 있다면, 나타난다면, ) B가 없는( 사라지는, 있는, 나타나는) 그런 관계성이 파악될 때
이 A가 있기(
나타나기, 없기, 사라지기) 때문에 B가 있다( 나타난다, 없다, 사라진다)는상호 관계를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현상적으로 인식하는
인과관계의 내용이다.
그래서 만일 이런 관계가 파악되지 않는다면, 즉 예를 들어 A 가 있거나 없거나 어느 경우에나 B가 있다면 A는
B의 있음에 대하여 원인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가 현상적으로 이해하는 인과관계의 내용은 대강 위와 같다.
그런데
이 A와 B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면 이 A가 B에 대해 직접 영향을 미치거나 작용하는 관계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 2
를 놓고 이해하면 이런 인과관계의 이해가 어떤 오류를 갖는 해석인지 이해할 수 있다.
2 는 그의 마음 5^ 안에 얻어진 내용만을
얻는다. 즉 그의 마음 5^ 밖에 있는 내용은 그 자신은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2 가 이 인과관계의 내용이나 요소로
이해하는 것들은 모두 2 의 마음 안의 내용들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관찰자 1 이 이런 2 의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를
살피게 되면 그것이 기본적으로 오류를 갖는 판단임을 보게 된다.
즉 비록 2 의 판단에서는 2 의 마음 5^ 안에 들어와 있는 내용들
간에서 일정한 관계가 앞에 나열한 것처럼 파악이 된다고 하여도, 이들 각 내용은 사실은 서로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작용을 주고 받는 관계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즉 2 의 마음안의 정신적 내용물인 불이 마음안 정신적 내용물인 종이에 붙어, 그런 연기와 재를 나타나게 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보다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해석이 비교적 적절할 것이다. 즉 2 가 종이에 불이 붙어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고 이해하는
과정은 2 의 마음안 내용물들이 그런 관계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관찰자 1 의 입장에서 볼 때 2 의 마음 밖의 내용들로서 4 와 같은 내용들은
서로 관계하고 다시 그것이 2 와 관계하여 2 의 마음 안에 즉 5^ 안에 2^ 이나 4^ 과 같은 그런 내용들로 인식되게 되고다시 이들간의
내용이 앞과 같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그렇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그와 같이 관련시켜 이해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두번째 해석은 또 문제가 있다.
즉 관찰자 1 의 입장에서 볼 때 2 의 마음 밖의 내용들로서 4와 같은 내용들은 서로 관계한다고
본 것은 사실은 관찰자 1 의 정신 안의 내용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거꾸로 관찰자 1 이 눈을 떠서 사물의 모습을 보게 되는
관계나 또는 관찰자 1 이 종이에 불이 붙어 타게 되는 모습을 2 라는 사람이 이해하기를 1 의 정신 밖에 있는 즉 2 자신이 보는 1^ 이나
4^ 이 서로 관계하여 그런 내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해석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사실은 다 정신적
내용물 즉 현상 밖의 실재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국 실재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다시 관련된다.
▽ 한편
인과관계를 이런 실재내용과 관련시켜 이해할 때는 실재내용을 얻을 수 없고 또 그렇게 얻을 수 없기에 있다거나 없다거나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등의 분별을 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 실재내용을 현상의 내용과 관련시켜 이해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실재내용은 현상 안에서 분별해 구분하는 여러 요소들로 그렇게 나뉘어진다거나 묶인다고 이해할 근거도 없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인해 현상내 내용물과 -> 실재내용 간에서는 또는 반대로 실재내용과 -> 현상 간에서는 서로 인과관계와 같은
관계로 이해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게 된다.
한편, 일정한 감각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일정한 관념을 얻어내는 관계 등은 그 기본재료가 모두
정신적 내용물로서, 그런 정신적 내용물이 직접 관계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들이 진리의
판단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있게 된다.
즉 감각내용과 관념은 그렇게 서로 일치 상응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기본적 한계가 있게 된다.
이는 별도로 후술하기로 한다.
여하튼 우리가 지금 논의대상으로 삼고 있는 여러 인과관계적 내용은 현상 안에서 이들을 서로 관련시켜
이해하는 방식이며, 이들이 직접 실재로 서로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 관계로 보기는 곤란한 것이다.
▽ 한편 이런 인과관계와 관련한 문제는
앞의 여러 문제들과 관련하여 실재내용과 관련시켜 이해하려는 방식에서 모두 같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
인과관계의 판단 착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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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9-수-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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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b
value 2013/10/07 22:03
위 글은 내용이 길고 복잡한 관계로
계속 부분 부분 시간을 두고 이어서 작성해나가기로
합니다.
Lab value 2013/10/08 02:39
글의 서술과정상 작성도중 잦은 수정과 변경이 이뤄짐을 양해
바랍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은 관계로 이만 줄입니다.
Lab value 2013/10/08 21:37
mun님의 지적에 따라 그림의 ' 기호 부분을 *표로 수정하고
표현도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이후 내용은 시간을 두고 계속
이어서 작성해나가고자 합니다.
Lab value 2013/10/09 00:59
글이 길어짐에 따라 이 글도
잡담공간에서의 댓글처럼
댓글을 통해서 작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즉 잦은 수정이 이뤄져야 하고,
전체 서술 과정에서
각 부분별로 글 순서와 달리 서술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판단에 관한 착오 문제는
그
범위가 상당히 방대하여, 서술해야 할 내용이 범위가 넓은데,
하나의 페이지에 계속 이어서 서술하면
글의 수정 정리가 복잡해지게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선 댓글란을 통해 추가할 내용을 적어 나가고
최종적으로 이것을 정리하여 본 페이지에 정리내용을
올리고자 합니다.
Lab value 2013/10/09 01:16
● 실재내용을 인과관계로
관련시켜 이해할 수 없는 이유
A와 B가 서로 원인이나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려면
어떤 관계성이 상호간에 파악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우선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A가 있거나 없거나 B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에는
A는 'B의 있음'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 다른 경우로서,
A가 있거나 없거나 B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에도 A는 'B의 없음'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A와 B가 인과의 관계가 있다고 보려면,
A가 있을 때 B가 있는데,
그러나 그런 경우 A가 없으면 B가 없게 되는 관계성이
파악되어야 A의 있음과 B의 있음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성이
있다고 보게 된다.
이것을 정리하여
A가 있을때( 또는 없을 때, 또는 생겨날 때,
또는 사라질 때)
B가 있고 ( 또는 없고, 또는 생겨나고, 또는 사라지고)
그 경우에 만일
A가 없으면 ( 또는
있으면, 또는 사라지면, 또는 생겨나면)
B가 없는 ( 또는 있는, 또는 사라지는, 또는 생겨나는)
그런 상호 관계성이 파악이 되어야
이 둘은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A가 있거나 없거나 생겨나거나 사라지거나,
B가 그로
인하여 아무런 관계있는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A와 B는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왼 손가락을 구부려 보거나
펴보거나 한다고 하여
이 내리는 비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한다면,
자신이 왼 손가락을 구부리거나 펴는 행위는
이 내리는 비와는 원인
결과 관계가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런데 실재내용은
실재내용은 현상의 본 바탕이 된다고 보는 것인데,
왜
현상과 원인 결과의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보게 되는가.
특히 현상이 모두 사라지면
그 경우에는 오직 실재내용만 있게
된다고 보는 경우에도
왜 현상과 실재내용은
서로 원인 결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되는가.
이것은
실재내용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의
판단을 행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의 방식으로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내용이 못 되는 것이다.
● 실재내용을 인과관계로 관련시켜 이해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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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2013/10/09 12:57 [ 작성 도중의 글 임시보관 ]
● 실재내용을
현상에서 얻는 내용과 동일하다거나,
유사하다거나, 또는 비례관계에 있다는 등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
--> 추후
논의
● 정신의 위치를 정하는 문제
정신의 위치를 정하고자 할 때
자신의 정신의 위치를 자신이 본
육체[그림에서 1]안에 정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 2의 정신의 위치를 자신이 본 2의 육체[그림에서 2] 안에 정하는 것은 판단오류다.
우선 다른 사람 2의 정신의 위치를 자신이 본 2의 육체[그림에서 2] 안에 정하는 것은 판단오류인 이유는 다음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 2가 생각하기를
관찰자 자신 1의 정신이
2가 관찰자 1을 바라보고 얻는 1의 모습, 즉 1
의 육체에
관찰자 자신의 정신이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을 옳은 판단이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관찰자 자신이
바라보아 얻은 2 의 모습에
2의 정신이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서 그림 상에서는 마치 2 의 정신이
2의 육체에 얹혀져 있고
그래서 5* 로 표시된 정신 내용물이
2 의 모습 위에 또는 머리 안에 넣어져 있다고 표시했지만,
이것은 일단 현상적 설명을 위한 표시이며
2 의 정신이 자신이 바라본 2 의 모습 위에 얹혀져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판단인 것이다.
그래서 현상적 내용에서
정신의 위치를 찾는다면
오직 관찰자 자신의 정신의 위치를
이
현상적 내용과 관련하여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결국 그림에서 나타낸 5와 같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은 타인의 정신을 직접 관찰할 수 없기에
관찰자 자신이 자신의 정신 내용물 안에서
타인의 정신을 찾고
그 위치를 찾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자신의 정신내용물 안에 타인의 정신이 위치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된다.
사실은 자신의 정신도 자신의 정신 내용물 외에는
명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는다.
▼ 또 하나의 판단 오류는
자신의 정신 내용물을 자신의 정신과 동일시하는 오류다.
///
▼ 자신의 정신의 위치를 자신이 본 육체[그림에서 1]안에 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오류다.
이는 다른 사람 2의 경우를 놓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만일 어떤 다른 사람 2가 자신이 바라 본 자신의
모습 [ 그림에서 2 * 별표] 안에 자신의 정신이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엉터리 해석임을 관찰자 1 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역으로 자신의 경우에 적용하면,
자신의 정신의 위치를 자신이 본 육체[그림에서 1]안에 정하는
것은
앞과 동일한 오류를 자신이 범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 정신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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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9-수-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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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G/G/07/703-PSYC/정신의_위치에_관한_판단착오.HTM ♠● 실재내용을 현상에서 얻는 내용과 동일하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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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2013/10/09 13:58 [ 작성 도중의 글 임시보관 ]
● 정신이 왜 정신 내용물의
변화 파괴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된다고 볼 것인가.
관찰자 1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신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일단 세계나 우주의 모습을 바라보고
정신 내용물로서 일정한 소리나 냄새 맛 촉감도 얻고
또 생각도 하고
기타 무의식적 반응도 일으키고 한다고 할 때
이 모든 내용을 그 안에 담고 있는 어떤 그릇을
추정할 수 있다.
만일 정신이 정신 자신을 직접 앞의 내용처럼
직접 감각하여 정신내용물로 확보할 수 있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상의 존재물들을 나열할 때,
정신의 위치를 잘못 잡고
정신을 그 현상 구성요소에서 빠뜨리는 착오를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신은 그 그릇안에 정신 내용물만을 담거나 담지 않거나 할 뿐
그 그릇이 자기 자신을
그 내용물로 담아 놓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신안 내용물과는 달리 이 정신이란 그릇을
현상적 요소에서 빠뜨리기 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정신을 현상적 요소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가.
정신안 내용물은 자신이 얻는데
이
내용물을 얻는 어떤 장소나 기관은
빠뜨리는 것이 적절한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비록 정신이
정신내용물만 우리에게 얻게 해주고
정신 자신은 그 내용물에서 빠진다고 하여도
우리는 이런 정신내용물을 통해서
이들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정신이란 그릇을 생각하고
또 그 위치를 잡아 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정신이란, 세계나 우주의
모습, 생각 등의 정신안 내용물을 모두
그 안에 담고 있는 그릇처럼 생각하면 된다고 본다.
그런데 정신이나 그 위치를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은 착각을 범하기 쉽다.
즉 정신안 내용물이 정신이란 그릇에 들어올 때만
정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은 정신안 내용물이 전혀 없을 때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또 정신안 내용물이 있을 때에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눈을 감으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눈을 뜨면 그
모습이 정신내용물로 담길
그 정신이란 그릇은 그릇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추정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신안 내용물이
있을 때에도
앞과 같은 이유로 정신이란 그릇은 내용물로서 포착되지 않는다.
또 정신안 내용물이 비워져 있을 때에도
역시
같은 이유로 정신이란 그릇은 내용물로서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안 내용물이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계속 정신이란
그릇은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 두 경우에나 언제나 그대로 포착되는 어떤 것을 찾아서
그것을 정신이라고 생각하려면
정신을
포착해내기 힘들고
정신의 위치도 잡아내기 힘들다.
여하튼 정신의 위치를 정신안 내용물과 관계하여 추정한다면,
세계나
온 우주의 모습을 담고 있을 때
이 현상적 내용물을 모두 정신내용물로 담고 있는
어떤 그릇과 같은 것을
현상적인 정신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정신을 현상적 요소에서 빠뜨리면 안 된다고 본다.
이 정신은 그렇다고 하여
실재대상이나 실재 주체의 실재 주관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물론 실재대상이나 실재 주관을 이 정신과 관련하여
추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삼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상적인 정신의 존재와 그 위치를
문제삼는 것임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정신의 위치를 잡을 때
그 정신이란 그릇은
다른 정신안 내용물과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정신안 내용물이란 결국
관찰자 1인의 입장에서는 그 관찰자 1인이 파악해 얻어낸
모든 현상적 내용을
다 포함한다.
그렇게 놓고 볼 때
이 모든 현상적 내용을 다 비운다 해도
그 정신이란 그릇은 여전히 현상적 요소로
존재하는 것이고
또 현상적 내용이 가득차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현상적 내용물들과 함께
같이 현상적 요소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지금 문제삼는 것이
정신의 실재내용이 아니고
현상적 차원에서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상적 차원의 정신은
비록 다른 현상적 내용물과 같이
감각적 내용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허공이 직접 감각으로 파악되지 않지만,
그 현상적 존재를 인정받듯
정신이란 그릇도 현상적 존재로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이란 그릇은
앞에서와 같이
즉 눈을 감아 눈으로 얻은 모든 현상적 내용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존재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는 다음을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관찰자 1 자신이
파악한 내용 가운데에서
어떤 부분은 그 정신의 정신 내용물의 변화에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는 부분이 있다.
즉
관찰자 1 자신이 스스로 본 1자신의 육체 부분이다.
이 육체부분에서 눈을 감기우면 정신안 내용물 가운데에서
색깔로 얻는
정신내용물이 모두 사라지고
또 뜨면 나타남을 경험하게 된다.
한편, 다른 신체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부분은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나
외부 사물 꽃 등과 같은 부분과는 다른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 관련성을 가지고
이 육체를 자신의 정신 기관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 2의 경우를
놓고 이해하면 쉽다.
만일 2 라는 사람이
자신이 바라본 2 * 의 모습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 때는
그 2
자신의 정신적 내용물 5* 의 내용이 함께 변화한다는 관계성을 파악하였다고 하여
자신이 바라 본 스스로의 모습 2*가 정신적
기관이라고 이해하면
오류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 관계성은 사실은
관찰자 1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와
2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바라볼 때 얻는 모습 2 * 사이에서
어떤 관계성이 있다고 보는 그런 관계와 같다.
여기서
우리는 관찰자 1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는
2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바라볼 때 얻는 모습 2 * 와는 달리,
2 라는
사람의 실재 주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록
관찰자 1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는
2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바라볼 때 얻는 모습 2 * 와는 달리,
2 의 주관적 정신 내용물 밖의 내용임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2 라는 사람의 실재 주체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관찰자 1의 정신 안에 들어와 있는
정신내용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여기서 우리는 관찰자 1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 나
2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바라볼 때 얻는 모습 2 * 은
모두 2 라는 사람의 실재 내용이 모두 아니라고 이해해야 한다.
만일 2 라는 사람의 실재 내용이
우리는 관찰자 1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 와
동일 유사하다고
받아들인다면,
이 관계의 추리는 비교적 쉬울 수 있다.
즉 2 라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건대
자신이 얻는 정신
내용물 5* 가운데에서
일정한 부분 즉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육체라고 보게 되는 부분 즉 그림에서 2*의 부분이
변화하면
정신 내용물 5* 도 변화한다는 관계성은
사실은 관찰자 1이 관찰할 때,
얻는 내용 가운데 일정한 부분
즉
관찰자 1 이 2의 육체라고 보게 되는 부분 즉 그림에서 2 의 부분이
변화하면 그에 따라 2의 정신내용물 5*가 변화하는 관계를
2의 정신 안에서는 그와 같은 관계로 이해해 받아들이는 것으로
유추 추리할 수 있다.
즉 앞에서 관찰자 1 이
관찰하게 되는 그런 변화와
2의 정신 내용의 변화를
2 자신은
자신이 얻는 정신 내용물 5* 가운데에서
일정한 부분 즉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육체라고 보게 되는 부분 즉 그림에서 2*의 부분이
변화하면
정신 내용물 5* 도
변화한다는 관계성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2 라는 사람의 실재 내용이
우리는 관찰자 1이 바라보는
2 라는 사람의 모습 2 와
동일 유사하다고 받아들인다면,
앞의 추리를 바탕으로,
실재 내용도 이런 관계성에 대한
추리 내용과
동일하거나 유사하거나 적어도 이와 비례하는
그 어떤 내용이라고
제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추리는 사실은
관찰자 1 이 관찰하는 2의 모습도
사실은 2 의 실재 내용이 아니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런 유추 추리의 근거를 잃게 된다.
또한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으며,
현상
내용과 실재 내용 사이에서는 서로 그렇게 상응관계나
비례 관계, 동일관계, 유사관계를 모두
단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추리는 다시 그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한편,
관찰자 1 자신이나
다른 사람 2 의 경우에나
사실은
정신이란 그릇이 놓이는
어떤 지점을 현상 안에서 찾아 제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정신이란 그릇은
현상안의 모든 내용을
그 안에 담고 있는 그릇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현상안 내용물을 다
담는 그릇의 위치를
그 그릇이 담고 있는 현상안 내용물안에서
찾아내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여하튼 우리는
현상적으로는
2 가 스스로 그 자신의 모습이라고 보는 2 *의 내용이 파괴되거나 변경되면,
또는 관찰자 1이 2 의 육체라고 보는
2 의 내용이 파괴되거나 변경되면,
또는 관찰자 1이 자신의 육체라고 보는 1 의 내용이 파괴되거나 변경되면,
그에 따라 각각의
정신 내용물이 변화되는 관계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이 각기 파괴되면
자신의 정신이란 그릇도 파괴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육체의 죽음과 정신의 소멸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상식적 믿음이다.
그러나, 앞의 관계성은 어디까지나,
실재의 관계성에 대해 현상적으로 파악해낸 관계성에 불과하다.
오히려
정신이란 그릇은
그 안의 모든 정신안 내용물이 다 사라지고 없어져도
또 다른 구비조건만 충족되면
또 그 안에 정신안
내용물을 채워 넣는
그릇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정신안 내용물 가운데에서
일부의 정신안 내용물[ 즉 각각의 육체
]과
정신안 내용물이 일정한 관계를 갖는 것처럼 파악되더라도
그것은 오직 정신안 내용물을 그와 같이
얻어내는
데에서만 작용하는 관계인 것이다.
이 실험을 진행하기 위해선
다시 현상안의 존재, 즉 정신안 내용물을 모두 다 비운 가운데
그리고 나서 정신이란 그릇은 어떻게 유지되고 변화되는가를
관찰하는 실험이 별도로 필요하다.
그런 가운데 잠정적
결론은
근본 정신은 정신이 어떤 실재적 주체 상태나, 현상적 육체와 관련하여
각 생에서 어떤 정신적 내용물을 얻고
어떤 내용을 그 자신의 육체로 파악하게 되는가와 관계없이
그 근본정신의 존재는 유지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매 생마다, 다른 생명의 형태로 바꾸어 살아가게 된다고 보는 것은
이 근본 정신이 매 생마다
다른 육체와
관련하여 정신 내용물을 얻어 갖게 되는 관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비록 정신을
관찰자 1
자신이 얻는 모든 정신적 내용물[=현상적 내용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고
따라서 정신의 위치를
관찰자 1 자신이 얻는 모든 정신적
내용물[=현상적 내용 전체]를 포함해 담을 수 있는
어떤 위치에 놓이는 그릇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때에도
이 정신이 그
정신안 내용물의 변화와 큰 관계없이
그대로 이어지고 유지된다는 것은
별개의 실험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이론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현상적 내용물들의 구성요소로서
고체, 액체, 기체, 에너지, 공간 등을 나열하는
가운데
현상의 모든 모습이 변화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들 근본 재료 자체는 늘고 줆이 없이
일정하게 유지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질량 에너지 불변의 법칙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는 현상적으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또
실재내용과 관련해서는
그 내용을 역시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늘고 줆 자체도 역시 말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여하튼 현상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 근본 재료 요소는
그 구체적인 모습의 변화와 관계없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으로 관념하게 된다.
이 때 이들 현상적 요소를 모두 그 안에
담고 있는 또 하나의 현상적 요소인 정신이란
그릇도
이와 같은 사정을 갖는다고 이해해야 한다.
즉,
앞에서 현상적인 근본 재료 요소를 나열하는 과정에서
빠뜨리기 쉬운
또 다른 현상적 요소
즉 이들 현상적 내용물과 요소를 모두 그 내용물로 담게 되는
현상적 요소인
정신이란 그릇도
정신안 내용물의 근본재료 요소가 그러하다고 보듯,
정신안 내용물이 매 순간 변화하고 모습을
달리하고,
그 정신의 작용이 매순간 변화해가는 것과 관계없이
일정하게 계속 이어져 유지된다고 보아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현상적 요소를 인정할 때
현상적 범위에서는 그 근본재료들이
모두 늘고 줆이 없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것과
같은 내용인 것이다.
....
● 정신이 왜 정신 내용물의
변화 파괴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된다고 볼 것인가.
Ω♠문서정보♠Ω
™[작성자]™ Lab 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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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9-수-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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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유지된다고 볼 것인가.O:/G/G/07/703-PSYC/정신의_위치에_관한_판단착오.HTM ♠● 정신이 왜 정신 내용물의 변화 파괴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된다고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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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내용물의 변화 파괴와 관계없이 계속 유지된다고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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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Mun Tokyun 2013/10/09 14:31
lab님의 글을 보면서
일체 유심조라는
단어를 떠올려 봅니다.
시간이 늦게 밥을 먹으려 하는데
생각해보니 정신의 위치나 정신의 정체를 밝히는 문제는
그릇에 밥을 넣고 그릇 안의 밥 안에서만,
그 그릇을 찾아 보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원래, 밥만 볼 때는 밥만, 현상적 내용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 밥을 담은 그릇이 보이지 않더라도
밥을
현상적 내용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이 담긴 그릇도 현상적 내용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lab님이 제시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그 밥과 그 그릇에 대한 실재내용을
또 생각해 나가는 것인가요.
여하튼 추후 논의를 기대해봅니다.
●일체유심조
Lab value 2013/10/09 17:35 ● 인과관계의 판단 착오
우리는
예를 들어
눈을 뜨면 사물이 보인다. 눈을 감으면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다.
또는 종이에 불을 붙이면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나는 것을 관찰한다.
또는 화분을 탁자 위에 올려 놓으면, 공중의 화분과는 달리 화분이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관찰한다.
또 막대기를 세개 서로 지지해 놓으면 서로를 의지하여 세울 수 있는 것도 관찰한다.
그런데 이들 모든 요소 즉 종이, 불, 연기,
재, 화분, 탁자, 막대기...등은
모두 우리가 눈을 떠서 얻거나, 귀로 대하거나...손으로 만지거나 해서 얻은 내용들이다.
또한
이들 각각은 그렇게 얻은 내용에 대해 다시 분별을 통해 관념을 세워 얻은 내용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서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사실은 우리의 마음 안 내용물을 이처럼 서로 관련시켜 이해하는 방식임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은 매
순간 이전의 내용과 다른 내용이 점유하게 된다.
그래서 사실 마음을 하나의 창고처럼 이해한다면,
창고 안의 내용이 비워져야
그 안에 다른 내용이 들어가게 되는 것처럼,
마음 안의 내용도 앞 내용이 마음에서 자리를 비켜 줘야 그 다음 내용이
차지해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따.
앞에서도 무엇을 대상으로 우리가 대하여 앞과 같은
마음안의 여러 내용을 얻었는지가 의문시
된다.
우리가 실재로 상대한 실재 대상의 내용은 무엇이고
또 이것과 실재로 상대한 실재의 주체와 주관 실재의 정신은
어떤
것일까.
이런 것도 의문이 된다.
그런데 이 실재내용은 끝내 얻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오로지 마음 안에
얻은
정신 내용물만을 가지고
현상내 여러 현상
즉 없다가 무엇이 나타나는 경우, 왜 그것이 나타나는가.
또는 무엇이
있다가 왜 그것이 사라지는가.
또는 무엇이 없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이것은 있는가.
또는 무엇이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이것은
없는가. 등의
여러 의문을 해결하려고 한다.
이 때 그 답을 현상안에서 이미 얻어 놓은 다른 내용물과 관련시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A가 있을 때 (,나타날 때, 없을 때, 사라질 때) B가 있고
(나타나고, 없고, 사라지고)
그 상황에서 그 A가 없다면, (,사라진다면, 있다면, 나타난다면, )
B가 없는( 사라지는, 있는,
나타나는) 그런 관계성이 파악될 때
이 A가 있기( 나타나기, 없기, 사라지기) 때문에 B가 있다( 나타난다, 없다,
사라진다)는
상호 관계를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현상적으로 인식하는 인과관계의 내용이다.
그래서 만일 이런
관계가 파악되지 않는다면,
즉 예를 들어
A 가 있거나 없거나 어느 경우에나 B가 있다면
A는 B의 있음에 대하여
원인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가 현상적으로 이해하는 인과관계의 내용은 대강 위와 같다.
그런데 이
A와 B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면 이 A가 B에 대해 직접
영향을 미치거나 작용하는 관계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 2 를 놓고 이해하면
이런 인과관계의 이해가 어떤 오류를 갖는 해석인지 이해할 수 있다.
2 는 그의 마음 5* 안에 얻어진 내용만을 얻는다.
즉 그의 마음 5 * 밖에 있는 내용은 그 자신은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2 가 이 인과관계의 내용이나 요소로 이해하는 것들은
모두 2 의 마음 안의 내용들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관찰자 1 이 이런 2 의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를
살피게 되면 그것이 기본적으로 오류를 갖는
판단임을 보게 된다.
즉 비록 2 의 판단에서는 2 의 마음 5 * 안에 들어와 있는 내용들 간에서
일정한 관계가 앞에
나열한 것처럼 파악이 된다고 하여도,
이들 각 내용은 사실은
서로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작용을 주고 받는 관계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즉 2 의 마음안의 정신적 내용물인 불이
마음안 정신적 내용물인 종이에 붙어,
그런 연기와 재를 나타나게
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보다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해석이 비교적 적절할 것이다.
즉 2가 종이에 불이 붙어
연기와 재가 나타난다고 이해하는 과정은
2 의 마음안 내용물들이 그런 관계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관찰자 1의 입장에서 볼 때
2 의 마음 밖의 내용들로서 4와 같은 내용들은 서로 관계하고
다시 그것이 2 와 관계하여
2의 마음 안에 즉 5 * 안에
2* 나 4 * 와 같은 그런 내용들로 인식되게 되고
다시 이들간의 내용이
앞과 같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그렇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그와 같이 관련시켜 이해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두번째 해석은 또 문제가 있다.
즉 관찰자 1의 입장에서 볼 때
2 의 마음 밖의 내용들로서 4와 같은 내용들은 서로 관계한다고 본 것은
사실은
관찰자 1의 정신안의 내용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거꾸로
관찰자 1이 눈을 떠서 사물의 모습을 보게 되는
관계나
또는 관찰자 1이 종이에 불이 붙어 타게 되는 모습을
2라는 사람이 이해하기를
1 의 정신 밖에 있는 즉 2 자신이
보는
1* 이나 4* 가 서로 관계하여 그런 내용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해석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사실은 다
정신적 내용물 즉 현상 밖의 실재 내용이 아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국
실재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다시 관련된다.
▽ 한편 인과관계를 이런 실재내용과 관련시켜 이해할 때는
실재내용을
얻을 수 없고
또 그렇게 얻을 수 없기에
있다거나 없다거나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등의 분별을 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 실재내용을 현상의 내용과 관련시켜
이해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실재내용은 현상 안에서 분별해 구분하는 여러
요소들로 그렇게 나뉘어진다거나 묶인다고 이해할 근거도
없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인해
현상내 내용물과 -> 실재내용 간에서는
또는 반대로 실재내용과 -> 현상
간에서는
서로 인과관계와 같은 관계로 이해할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게 된다.
한편, 일정한 감각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일정한 관념을 얻어내는 관계 등은
그 기본재료가 모두 정신적 내용물로서,
그런 정신적 내용물이 직접 관계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들이
진리의 판단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있게 된다.
즉
감각내용과 관념은 그렇게 서로 일치 상응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기본적 한계가 있게 된다.
이는 별도로 후술하기로 한다.
여하튼 우리가 지금 논의대상으로 삼고 있는 여러
인과관계적 내용은
현상안에서 이들을 서로 관련시켜 이해하는
방식이며,
이들이 직접 실재로 서로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 관계로
보기는 곤란한 것이다.
▽ 한편 이런 인과관계와
관련한 문제는
앞의 여러 문제들과 관련하여
실재내용과 관련시켜 이해하려는 방식에서
모두 같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 인과관계의 판단 착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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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9-수-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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ㅹ[ 코멘트 등 정리
내역]ㅹ
더보기
이를 살피기 위해
정신작용을 대강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에는 다음의 어려움이 있다.
[tr]
◈Doctr Gong 2014/01/07/화/11:48
● 서로 다른 차원의 정신내용 먼저 정신내용물에는 그
차원과 성격이 다른 여러 내용이 함께 섞여 있다.
그런데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서로 혼동이 일어나기 쉽다.
예를 들어
‘꽃’을 예를 들면 그 사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외부에 실재하는 꽃[실재내용#]과 신체의 감관 예를 들어 눈[실재내용#]이 관계하여
우리 정신에서 꽃의 모습[감각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한다.
그리고 감각내용을 기초로 인식기관에서는 꽃의 관념내용[개념내용@]을 다시
얻는다.
여기서 관념내용이란 실제 꽃의 모습을 보지 않는 순간에도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런 꽃들을
가리키기 위해 ‘꽃’이란 글자나 [kkot]이란 말소리같은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래서 언어내용으로서 꽃[언어내용%]을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다.
참조로 언어내용의 본질은 앞의 내용과 같은 것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또 다른 감각내용[글자형체!나,
소리!같은
감각내용]이나 관념[글자관념@,
소리관념@] 또는 이들의 기초가 되는 실재내용[외부글자#나 소리#자체]들을 의미한다.
한편 이들
내부에 이들 각 내용을 일으키는 원천으로서 영원히 고정되고 불변적인 본체가 있으리라고 추리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렇게 추리되는 꽃의
실체[실체내용$]를 또 하나 별도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 모든 내용을 언어 ‘꽃’으로서 다 함께 표현할 수 있다.
실제 일상생활에서 ‘꽃’이란 언어표현은 이들 각각을 그 때 그 때 가리키면서 사용된다.
그러나 상호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다지 큰 혼동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정신과정을 분석할 때는 이들 각각의 상호관계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각기 다른
차원의 내용들을 모두 같은 언어로 표현하다보면 혼동이 일어나기 쉽다.
예를 들어 꽃을 보고 꽃의 모습을 얻은 뒤 꽃의 관념을 갖고 이를
기초로 좋은 느낌을 얻는다고 설명한다고 하자.
이 때 각 부분에 사용된 꽃이라는 표현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내용을 가리킨다.
그
결과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
따라서 이들을 서로 다른 기호로 구별해 표시할 필요성이 있게 된다.
여기서는 이를 위해 이들 서로
다른 차원의 내용을 실재내용[#] 감각내용[!] 개념내용[@] 언어내용[%] 실체내용[$] 등으로 구별해 표시하기로 한다.
이런 기호를
사용하면 위 내용을 ‘꽃#을 눈#이 대하여 꽃!을 얻고 다시 이를 기초로 꽃@을 얻으며 이 과정에서 좋은 느낌을 얻는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 정신작용과 내용 관찰의 어려움한편 정신작용의 관찰에는 다음의 어려움이 있다.
정신작용은 일상생활에서 늘 익숙하게 반복한다.
그러나 이를 실제로 분석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우선 타인의 정신작용은 그 내용 자체를 다른 제 3자가 파악하기 곤란하다.
물론 언어표현을 통해 어느 정도 추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자체를 제 3자가 직접 얻어 확인할 수 없다.
결국
언어로 표현된 내용이 어떤 정신내용을 가리키는 지는 자신의 정신작용을 스스로 음미하면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정신작용을 한편으로
수행하면서 또 한편으로 행해지는 정신작용을 음미하고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먼저 수행되는 정신작용 A와 별도로 이를
관찰하는 정신작용 b가 작동해야 한다.
또 이렇게 관찰하는 정신작용 b는 관찰대상인 자신의 정신내용 A를 대상으로 삼아 뚜렷이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관찰대상이 되는 정신내용은 그렇게 뚜렷이 파악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론상 다음 문제가 있다.
파악하고자 하는 정신내용이 A이고,
이 A를 파악하고자 하는 정신작용 b가 작동된다고 하자.
그러면 정신상태는 곧 A+b의
상태로 변질된다.
따라서 본래의 A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한 주체가 일상적인 정신작용 A를
수행하면서 또 별도로 이를 파악하는 의식 b를 작동시켜 A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실제로 쉽지 않다.
[tr] 한편 한 주체는 여러
특이한 정신내용을 골고루 자유롭게 경험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나 웃을 때를 파악하려할 때 각 주체가 늘
자유롭게 그 때 그 때 그런 정신작용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또 자연스럽게 그런 상황이 될 때는 이를 관찰하는 정신작용이
개입되지 않아,
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정신작용은 대부분의 생명이 매일 행하는 매우 손쉽고 친근한
내용이다.
사실상 정신작용에 대한 복잡한 이해가 없어도 보통 생명체들은 많은 정신작용을 자연스럽게 잘 행한다.
다만 앞의 사정으로
정신작용을 살피는 데는약간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약간 복잡하지만,
정신작용을 이해하게 되면 행복을 얻는 과정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또 이를 이용해 선한 행복을 얻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전제에서 정신작용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자.획득내용[*]● 논의의 대상으로서 획득내용[*]정신작용의 설명을 위해 정신이 가장 기초적으로 얻는 감각내용[!]과 이를 얻게 하는
실재대상[#]과 실재의 주관[#]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감각으로 얻는 내용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대표로 시각만을 기준으로 살피기로 한다.
그런데 이에 관련한 논의는 대단히 많고
복잡하다.
그런데 각 논의들을 이해하는데 혼동을 일으키는 첫 번째 요소는 언어의 애매성이다.
즉,
각 논자별로 대상,
주관,
정신,
감각자료,
감각내용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각 논자가 사용하는 언어표현이 정확히
정신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각 주장의 내용이 함께 불명확해져 혼동을 일으킨다.
이제
본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논의대상을 좀 더 명확하게 가리키는 가운데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논의의 대상으로서 획득내용[*]논의의 대상을
좀 더 명확히 가리키기 위해 가장 기초적으로 다음의 자기 실험을 해보자.
이제 가만히 앉아 우리 스스로 눈을 감고 뜨고를 계속
반복해보자.
그 때마다,
눈앞에 외부 대상물들과 신체의 일부[손,
발]의 모습이 함께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
경험한다.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다음의 상황을 가정하고 이를 그림으로 표시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내용이 어떤 차원의 내용인가가 가장 먼저 문제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매우 단순한 문제다.
그러나 이 논의가 정신작용을 이해하는 가장 기초가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매우 다양한 주장이 있다.
여기서는 이를
논의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논의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다시 앞과 같이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자.
그리고 그에 따라 가장 1차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내용이 무엇인지 각자가 정확히 확인하자.
그 내용은 주체가 놓인 상황에 따라
먼 산,
도시의 빌딩,
바다,
하늘,
우주의 별의 모습 등 광대한 범위를 다 포함할 수 있다.
여기서 일단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내용 전체를 ‘획득내용[*]’이라는 생소한 표현으로 나타내기로 한다.
그리고 획득내용[*]가운데 일부분을 가리킬
때는 그 부분을 가리키는 명칭 다음에 [*] 기호를 붙여 구별하기로 한다.
예를 들어 획득내용[*] 가운데는 산[*] 대상[*]
주체[*]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각 개인 상황마다 이런 획득내용[*]이 가리키는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이 획득내용[*]이 가리키는 내용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고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다음 논의를 이해해야 한다.
다시 한 번 획득내용[*]을 정의하면 그것은 각자가 눈을 감고 뜸에 따라 가장 1차적으로 변화하여,
얻거나,
잃어버리는
내용이다.
획득내용[*]에는 획득내용[*]을 기초로 다시 얻는 개념내용,
판단 등은 획득내용[*]에서 제외한다는 것도 주의하기로
하자.위 그림에서는 편의상 자신이 제3자[*]가 꽃[*]을 보는 것을 바라볼 때 얻는 모습[*]을 나타냈다.
획득내용[*]은 비교적
선명한 그림부분이며 가운데 표시를 하였다.
나머지는 이를 기초로 얻는 여러 정신작용에 대해 본서가 얻는 결론적 내용을
나타낸다.획득내용[*]의 본질이제 이런 획득내용[*]이 어떤 차원의 내용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
이해의 편의를 위해 본서에서 취하는
결론을 먼저 밝히면 다음과 같다.
본서에서는 이처럼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얻고 변화하는 획득내용[*]을 감각내용[!]으로 본다.
그것은 정신내용[감각내용!,개념내용@,...]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 감각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과 주체[#]의
실재 내용[#]은 획득내용[*]과 별개로 있다고 일단 추리한다.
그러나 그 외부대상[#]과 주체[#]의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실재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있다,
-이 없다,
-이다,
-이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의 어떤 이분법적인 분별로도 분별할 수 없다.
한편 이처럼 실재내용[#]이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분별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불교에서는 ‘공(空)하다’라는 표현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상이 본서가 취하는 결론적 입장이다.그런데
획득내용[*]을 과연 정신내용으로서 감각내용[!]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실재대상[#]과 주체[#]로 볼 것인가부터 문제될 수 있다.
또 획득내용[*]이 감각내용[!]이라면 그것을 일으킨 실재대상이나 주체[#]는 또 어떤 것으로 볼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들 문제에
대해 각기 다른 주장들이 많다.
이런 주장들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현상의 진리론’에서 보다 자세히 살피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본서에서도 좋음의 느낌의 발생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런 기초적인 내용이 필요하다.
또한 본서의 다른 논의에도 이런 기초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
따라서 그 대강을 살피기로 한다.우선 눈을 감고 뜸에 따라 1차적으로 변화하는 획득내용[*]이
어떤 차원의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우선 ㉠ 이 획득내용[*]을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주체자신(정신)[#]으로 나눠 파악하는
입장 ㉡ 이 획득내용[*]의 본질은 정신이라는 입장 그리고 이 정신내용을 외부대상으로 파악한다는 입장[唯心說],
또는 이 획득내용[*]은
단지 정신[識]의 내부 변화일 뿐이며 외부에 실재내용[#]은 없다는 입장[유식무경(唯識無境)-아뢰야식연기설(阿賴耶識緣起說)] ㉢ 이
획득내용[*]은 정신내용[!]이며 이 부분 밖에 실재 대상[#]과 주체[#]를 추리해 설정하는 입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그리고 ㉢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추리한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다시 그 실재내용[#]이 ⓐ 감각내용[!]과 동일한 모습이다 ⓑ 단지 감각내용[!]과 유사한
것으로 추리된다 ⓒ 정신은 이를 끝내 얻을 수 없다는 입장들로 나눌 수 있다.본서가 취하는 결론은 ㉢의 ⓒ에 해당한다.감각내용[!]본서의
결론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눈을 떴을 때 파악되는 획득내용[*]을 상식적으로 외부 대상물[#]과 자신의 실재내용[#]으로 나눠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이는 외부 대상이나 자신의 실재내용[#]이 아니고 자신의 정신내용물로서 감각내용들[!]이다.우선 본 논의의
결론의 이해를 위해 다음 비유를 든다.
‘한 사람이 꽃을 바라보는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고 하자.
이 때 ㉮ 거울에 비친 ‘사람의
영상!’이 ‘꽃의 영상!’을 바라보는가.
㉯ 아니면 거울 밖 사람#이 거울 밖 꽃#을 보고 단지 그 모습!이 거울에 맺힌 것인가?
여기서 거울은,
이들을 바라보는 이의 정신을 비유한다.
한편 자신의 정신과정을 스스로 관찰하는 경우는 다음 경우에
비유하자.
거울이 둥글어 거울 밑받침까지 비춘다.
이 때 ㉮ 거울에 비친 ‘꽃!과 거울밑받침의 영상!’ ㉯ 또는 영상 밖의
‘꽃#과 거울#’ 가운데 어느 것이 이 모습을 맺히게 한 것인가.
‘꽃!을 손!으로 잡는다’는 행위도 이들에 준한다.우선 이는 비유다.
이 비유가 입증근거는 아니다.
다른 입장에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들 수 있다.
다만 본 논의의 결론을 위 비유로 미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위 비유에서 모두 ㉯처럼 실재대상#과 주체#가 거울 표면에 영상!을 맺히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정신의 영상!은 외부 실재내용#에 의해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거울비유와 달리,
그 실재내용#은 비록 추리는 되지만 그
내용은 어느 정신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不可得,
空] 이런 결론은 앞에서 본 것처럼 ㉢ⓒ의 입장이다.이는 우선 획득내용[*]에
대해 상식적인 입장에 반대된다.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획득내용[*]을 통상 ㉠처럼 자신#과 외부사물#로 나누어 해석한다.
그러나
본서의 결론은 이들 획득내용[*]이 ‘정신 안의’ 내용물[감각내용!]임을 의미한다.
이는 오늘날 의학지식과 관련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산에서 도시모습 전체를 획득내용[*]으로 본다고 가정하자.
그 경우,
그 획득내용[*] 전부는 사실은 자신의
뇌# 안의 스크린#에 맺힌 감각내용!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를 감각내용[!]으로 표시하는 것이다.근거우선 획득내용[*]을
정신내용[!,@] 가운데 하나로서 감각내용!으로 보게 되는 근거를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상식적인 입장에서는 획득내용[*]을
대상#과 주체#의 부분으로 나눠 설정한다.
즉,
상식적인 이해에서는 획득내용[*]을 다음 방법으로 정신 밖의 실재대상[#]과
주체[#]로 나누어 생각한다.
그것은 다음 사정 때문이다.
우선 어떤 이가 눈을 뜨면 획득내용[*]으로 늘 자신의 신체
일부[*]와 그 외 외부내용의 모습[*]을 얻게 된다.
또 눈을 감으면 이들 모습은 사라진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는 가운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 부분[*]은 매번 공통해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미국을 가던 프랑스를 가던 자신의 몸 부분[*]만은 늘 얻는
내용이 된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자신의 주체’,
신체 자체[#]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머지 매번 달라지는
내용부분[*]은 외부대상 객체[#]로 생각한다.한편 이런 판단은 촉각으로도 지지받게 된다.
예를 들어 손[*]을 대어 양 부분에 감촉이
느껴지는 부분은 자신의 신체부분[#]이 된다.
몸[*]에 손[*]을 대면 몸도 감촉을 느끼고 손도 감촉을 느낀다.
그리고 이와
달리 일방적인 촉감만 느끼는 부분은 외부대상[#]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이렇게 획득내용[*]을 자신[#]과 외부 영역[#]으로 나눈다.그
다음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된다.
우선 이 몸부분[주체]#과 나머지부분[외부대상]#이 관계해 정신내용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내용은 획득내용[*] 가운데 자신의 몸부분[*]의 내부에 자리잡는다고 파악한다.또 타인[*]이 꽃[*]을 보거나 만지는
것을 관찰할 때도 이처럼 판단한다.
즉,
획득내용[*] 가운데 ‘자신의 보는 타인부분[*]이 꽃부분[*]을 보거나 만진다’고
이해한다.
또 타인이 얻은 정신내용은 타인 부분[*]에 숨어 자리잡는다고 이해한다.
또 획득내용[*] 가운데 꽃 모습[*]이
향기를 준다고도 생각한다.
이런 입장과 해석은 일반 의학이나 물리학 또는 상식인의 해석에 가깝다.그런데 이런 이해는 다음 난점이 있다.
만일 획득내용[*] 가운데 자신의 몸 부분[*]과 외부[*]가 직접 관계해 감각내용[!]을 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감각내용!은
어디에 있는가.
사실상 감각기관을 여닫음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이들 획득내용[*] 자체다.
이들 획득내용[*] 외에 또
다른 감각내용은 찾을 수 없다.
물론 이들 획득내용[*]을 얻을 때 정신은 이를 기초로 개념내용[@]을 별개로 얻게 된다.
그래서
이런 개념내용@을 감각내용!으로 혼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따라서 통상 획득내용[*]에서 외부대상과 주체로 나눠
본 내용은 곧 자신의 정신이 얻은 감각내용!이라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실재 대상[#]과 주체[#]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그러나
만일 획득내용[*]에서 대상부분[*]과 주체부분[*]을 나눠 이를 실제 작용 반응하는 실재대상[#]과 주체[#]라고 가정한다고 하자.
이렇게 해석하면,
일정한 획득내용[*]은 감각하는 대상[#]과 주체[#]인 동시에 그 대상에 대해 정신이 작용해 얻는
정신내용물[!]도 된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이상한 해석이 된다.
즉,
획득내용[*] 가운데 일부인 대상부분[*]에
다시 그 일부인 주체부분[*]이 작용하여 전체 획득내용[*]을 얻는다는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또 상식적인 해석에 의하면 다음 난점이 있다.
우선 자신이 눈을 감으면 이들 획득내용[*]은 모두 사라진다.
이처럼 이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정말 앞 순간에 그 안에
맺혔던 외부 대상[#]들과 신체일부[#]는 함께 사라진 것일까?
또 나타날 때는 없어졌던 대상[#]과 신체[#]가 다시 나타난 것일까?
획득내용[*]을 실재대상[#]과 주체[#]로 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획득내용[*]이 나타나고 사라질 때도 이들을
얻게 한 실재대상[#]과 주체[#]는 여전히 다른 감각들은 얻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외부대상[*]에 손[*]을 대고 있었다고 하자.
이제 눈을 감아 그런 모습들[*]이 사라져도 촉감[!]은 계속 유지될 수 있다.
따라서 획득내용[*]의 나타나고 사라짐에 관계없이
여전히 촉감[!]을 주는 실재대상[#]과 주체[#]는 계속 유지된다고 추리해야 한다.
그러나 눈을 감을 때는 획득내용[*]안의
외부대상[*]과 자신의 신체[*]는 사라진다.
따라서 이렇게 사라지는 획득내용[*]안의 외부대상[*]과 신체[*]를 그런 실재대상[#]과
주체[#]로 볼 수 없다.한편 획득내용[*]을 실재대상[#]과 주체[#]로 보는 입장은 타인과 자신의 감각과정을 관찰할 때도 문제가 많다.
획득내용[*]과 별개로 실재 대상[#]과 주체[#]를 추리하는 근거를 다음 관찰로 살피자.이제 이를 위해 옆에 한 사람을 놓고 그 앞에
꽃을 놓고 눈을 감고 뜸을 반복하게 하자.
그리고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보고하게 하자.
그러면 그는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자신처럼
일정한 모습[=그 제 3자의 획득내용[*]]이 사라지고 나타난다고 보고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계없이 그가 ‘못 본다[%]’고 할 때
도 자신의 관찰에서 꽃[*]과 그 타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본다[%]’고 할 때도 꽃[*]과 타인[*]이 서로에게 들어가고 나오는
변화는 없다.
옆에서 계속 관찰하면 그런 보고와 관계없이,
외부물체[*]나 그 사람[*]은 모두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런데
제 3자가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제 3자는 그의 획득내용[*]이 사라지고 나타남을 반복한다고 보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제
3자의 획득내용[*]과는 별개로 그 제 3자의 외부에 유지되는 외부대상[#]과 제 3자[#]가 있다고 추리할 수 있게 된다.그런데 이 경우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제 3자가 얻는 변화는 관찰자가 직접 알 수 없다.
따라서 다음 문제를 계속 추리해보자.
① 우선 제 3자에게
일어난 변화는 어떤 내용일까?
② 이런 제 3자의 변화는 어느 부분에서 일어나는 내용인가?
③ 또 제 3자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어떤 것들이라고 해야 하는가?
④ 종국적으로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은 어떤 차원의 내용일 것인가? ① 먼저 제 3 자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이었을까를 다음 방법으로 추리해보자.
우선 자신도 그 제 3자처럼 다시 눈을 감고 뜸을 반복해보자.
이 때
자신이 눈을 감고 뜸을 반복함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내용이 있다.
그것은 앞에서 본 자신의 획득내용[*]이다.
한편 자신과 제
3자는 신체가 유사하다.
한편 제 3자가 언어로 정직하게 보고해준다면 그에게 일어난 변화는 자신의 획득내용[*]과 유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기초로 제 3자가 보고한 변화도 자신의 획득내용[*]에 유사한 내용일 것으로 추리하게 된다.
즉,
제 3자의 획득내용[*]은 외부대상[*]과 제 3자 자신의 신체의 일부[*]의 모습일 것이다.② 이제 제 3자가 일정한 획득내용[*]이
나타나고 사라진다고 보고한 변화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를 생각해보자.
제 3자가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외부대상과 제 3자는 관찰자의
관찰에서는 대부분 일정하게 유지된다.
제 3자가 획득내용[*]이 사라진다고 보고할 때에도 사라지는 내용을 관찰할 수 없다.
나타난다고 할 때도 새로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할 수 없다.
단지 그 변화는 제 3자가 해주기 때문에 추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보고는 그 제 3자[*]만 한다.
따라서 그 변화는 꽃[*]과 제 3자[*] 가운데 그 제 3자[*] 영역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변화로 추리할 수 있다.③ 이제 제 3자에게 그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는 무엇인가?
제 3자가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제 3 자쪽 영역[*]의 내부에서 제 3자만의 획득내용[*]을 갖는다.
이 때 관찰자는 관찰자가 본 제 3자의 눈[*]이 감고 뜸의
변화가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관찰자가 본 대상[*]에 대해 제 3자가 눈[*]을 떠 이들이 관계할 때 제 3자가
획득내용[*]을 얻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관찰자가 본 제 3자의 눈[*]이 감겨지면 그 관계가 맺혀지지 않아 제 3자의
획득내용[*]의 사라진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는 제 3자의 경우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그 제 3자의 획득내용[*] 밖의 내용 관찰자가 본
대상[*]과 눈[*]의 관계에 설정한다.
이는 제 3자의 획득내용[*]을 얻게 한 실재대상과 주체를 제 3자의 획득내용[*] 안의 각
부분[*]에 설정하는 주장들과는 다른 내용이 된다.
따라서 이는 앞에서 자신의 획득내용[*]을 이해할 때와는 다른 해석이 된다.
앞에서 자신의 획득내용[*]을 이해할 때는 자신의 획득내용[*] 가운데 대상[*]과 자신의 신체부분[*]이 관계한다고 이해하였다.
만일 이를 제 3자의 획득내용[*]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앞과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
즉,
제 3자의 획득내용[*]은
관찰자가 본 외부대상[*]과 관찰자가 본 제 3자[*]과 관계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제 3자의 획득내용[*] 가운데서의 외부대상[*]과
제 3자의 획득내용[*] 가운데서의 제 3자 자신[*]이 관계한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어느 쪽 해석이 타당할 것인가?
관찰자가 본
외부대상[*]과 관찰자가 본 제 3자[*]과 관계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 하면 제 3자가 눈을 감고 뜸의 변화에 따라 제
3자가 획득내용[*]을 얻고 잃고를 반복해 보고하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제 3자의 획득내용[*]을 일으킨 실재 대상[#]과
실재하는 주체[#]를 제 3자의 획득내용[*] 밖에 설정해야 옳다고 추리할 수 있다.④ 한편 제 3자의 획득내용[*]은 어떤 차원의 내용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제 3자의 획득내용[*]은 관찰자가 직접 관찰할 수 없다.
그것은 관찰자가 관찰 가능한 외부대상[*]이나 제
3자의 신체[*]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제 3자의 영역[*]에 숨은 제 3자의 정신적 내용으로 추리해야 타당할 것이다.이런 내용을
기초로 이제 다시 자신의 획득내용[*]을 이해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이제 자신이 눈을 뜨면서 얻은 획득내용[*]을 확인해보자.
이것은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의 변화와 유사할 것이다.
자신이 눈을 뜨거나 감음에 따라 획득내용[*]으로서 꽃[*]과
자신의 모습[*]을 얻거나 잃는다.
이 때 이런 획득내용[*]의 변화와 관계없이 이를 일으킨 실재 외부대상[#]과 자신의 감관[#]이
획득내용[*] 밖에 따로 있다고 추리해야 옳다.
그리고 이런 획득내용[*]은 그 가운데 실재하는 자신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옳다.
즉,
획득내용[*]의 변화는 그 획득내용[*]의 일부인 자신[*]에서 일어난다고 추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획득내용[*]은 자신# 영역에 머무르는 자신의 정신내용물[!]로 추리해야 한다.
오늘날 타인의 정신 영역은
타인 신체 안의 뇌로 추리한다.
따라서 자신이 본 모든 사물[*]과 자신[*]의 모습은 아무리 광대해도,
모두 그런 뇌[#]
스크린에 자리잡은 모습[!]으로 추리해야 한다.
일단 이는 모두 다른 입장들과 다른 해석이다.
이제 손[*]을 내어 꽃[*]을
잡는다고 하자.
이때도 자신의 마음 속 손[!]이 꽃[!]을 잡는다고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감각내용들[!]의 변화에 상응한
손[#]과 꽃[#]의 변화[#]가 정신에 그런 모습[!]으로 맺힌다고 이해해야 한다.감관이 외부대상과 관계하여 얻어낸 정신내용물 가운데 가장
1차적인 내용물을 감각내용[!]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각내용[!]을 기초로 다시 얻는 정신내용물을 개념내용[@]이라고 한다.
결국
자신이 눈을 감고 뜸에 따라 1차적으로 변화하여 얻는 획득내용[*]은 정신내용의 하나로서 감각내용[!]인 것이다.이런 관계를 거울을 놓고 다음과
같이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거울에 사람과 꽃의 모습이 맺힌다고 하자.
이 때 사실은 거울 밖의 실재 사람[#]이 꽃[#]을
바라보거나 만지고,
그 영상만이 거울에 맺힌 것이다.
그런데 거울 모습만을 보고 외부실재[#]를 보지 못하는 이가 거울만을 계속
본다고 가정하자.
그 경우에는 자칫 거울에 비친 ‘사람의 영상부분!’이 ‘꽃의 영상부분!’을 바라보거나 만진다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작용은 외부의 사람[#]이 수행하고 그 영상!이 거울에 맺힌 것이다.
따라서 영상!의 한 부분이 다른 영상!을
실제로 보거나 만지는 것으로 이해함은 잘못이다.다만 대부분의 사람이 감각내용!을 실재내용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다음이다.
우선 실재대상과
주체[#]의 내용은 다음에서 살피는 것처럼 주체가 직접 얻지 못한다.
얻는 것은 오직 앞에서 본 감각내용[!] 밖에는 없다.
마치
앞의 거울의 비유에서 오직 거울에 비친 내용 밖에는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상황이 닫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그 감각내용[!]은
실재대상[#]과 주체[#]로부터 변화되는 내용을 즉시즉시 반영해준다.
그래서 결국 이 감각내용[!]을 실재대상과 주체[#]와 동일시하여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동일시해 이해해도 생활에서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컵[!]을 손[!]으로
만지거나[!] 들어올리면[!],
컵은 뜻대로 촉감[!]을 주거나 컵이 들어 올려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따라서 컵의
모습[!]을 굳이 정신내용으로 이해하지 않아도 생활에 하등 지장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만일 이를 정신내용[!]으로 이해하면 부적절하게
생각되기 쉽다.
예를 들어 자신의 정신내용의 일부분인 손[!]이 또 다른 정신내용인 컵[!]을 만져 촉감[!]을 얻거나 컵이
들어올려진다고 이해하면 부적절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은 감각내용[!]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면 결국 그에 상응한
실재내용[#]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곧바로 감각내용[!]으로 얻어지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거울의 비유를 들면 거울에 비친 컵의 영상[!]자체가 거울에 비친 손의 영상[!]자체를 만질 수는 없다.
그러나 거울에 비춰진
컵의 영상[!]을 손의 영상[!]이 만져지는 모습을 얻으려 노력하면 실제 거울 밖의 신체가 그렇게 움직여주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곧바로 거울의 영상[!]으로 얻어지는 관계가 있는 것이다.따라서 이런 모습의 변화를 감각내용[!]으로 이해하는 전제에 의하면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일정 주체부분[!]과 대상[!]이 관계 맺는다고 보여질 때 사실은 그 실재내용[#]들이 서로 관계 맺는다.
단지 그 내용이 우리에게 감각내용[!]으로 그와 같이 맺히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감각내용[!]안에서 손[!]으로 다리[!]를
만진다고 보일 때,
사실은 손[#]이 다리[#]를 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 각기 시각으로 그런 모습이 보이고,
또
촉각으로 감촉이 함께 느껴지는 것뿐이다.그러나 현실생활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해하든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어떤 해석을 따르더라도 각
주체가 실제 얻는 내용은 감각내용[!]으로서 획득내용[*]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주체는 이 감각내용[!]을 기초로 활동한다.
그리고 이렇게 활동하면 실재내용[#]도 그에 상응해 변화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지장이 없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다만 이
획득내용[*]을 실재 주체[#]나 대상[#]으로 이해하면 인식론적인 해석상 많은 오류가 일어나게 된다.
여기서는 논의의 결론으로
획득내용[*]은 정신적 내용으로 감각내용임을 보았다.
이제 다음은 이런 감각내용[!]으로서 획득내용[*]을 얻게 한 실재 주체[#]나
대상[#]은 어떤 내용인가를 이어서 살피기로 한다.실재 대상[#]과 주체[#]본서의 결론앞에서는 자신이 눈을 감았다가 떠서 얻게 되는
획득내용[*]이 정신내용물로서 감각내용[!]임을 보았다.
그리고 이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주체[#]는
획득내용[*]과 별개로 있다고 일단 추리했다.
그러나 그 외부대상[#]과 주체[#]의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어떤 주체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실재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있다,
-이 없다,
-이다,
-이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의 어떤 이분법적인 분별로도 단정해 판단할 수 없다.
한편 이처럼 실재내용[#]이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분별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불교에서는 ‘공(空)하다’라는 표현으로 표현하게 된다.
이상이 본서가 취하는 결론적 입장이다.근거앞과 같은
결론은 어떤 근거로서 도출되는가?
일단 앞에서 본 내용이지만 다시 정신과정을 이해해보자.
우선 제 3자의 정신작용의 관찰에서 다음
사실을 추리할 수 있다.
제 3자는 눈을 감고 뜸에 따라 획득내용[*]의 변화를 보고한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하는 제 3자의
획득내용[*]은 오직 그 제 3자의 영역 내부에 숨어 있다.
따라서 이는 제 3자의 정신 내부에 있는 정신내용이라고 추리한다.
그리고 제3자의 정신내용 자체는 관찰자는 직접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제 3자의 정신내용에 변화가 있음을 제 3자가 보고해줘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자신이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얻는 획득내용[*]과 유사하리라고 추리하게 된다.
그런
추리는 제 3자의 보고내용과 함께 제 3자와 자신의 신체가 갖는 유사성에 기초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관찰자는 제 3자의 정신내용의
변화와 관계없이 외부대상[!]과 제3자의 모습[!]이 일정하게 유지됨을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기초로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 밖에 별도로 이를 얻게 한 실재대상[#]과 제 3자[#]를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이제 이를 기초로 자기 자신의 감각내용[!]으로
돌아오자.
자신도 눈을 감았다가 뜰 때 변화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얻은 감각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자신을 제 3자가 관찰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 제 3자도 자신이 얻은 감각내용[!]은 직접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 3자는 내가 얻는 감각내용[!]과는 별도로 이를 얻게 한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내 모습에 대해 다시 감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얻은 감각내용[!]과 별도로 그 외부에서 나 자신과 제 3자에게 감각내용[!]을 얻게 하는 실재내용들을 나 자신의
획득내용[*] 밖에서 추리해야 하는 것이다.이렇게 감각내용[!]을 얻게 하는 실재하는 자신#과 대상#이 일단 추리된다고 하자.
그럴 때
이 실재내용들#을 어떤 내용으로 정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된다.
이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 감각내용!으로 파악된 대상!과 자신의 모습!과
동일한 내용이라는 입장 ⓑ 단지 그런 모습들!과 유사하리라고 추리된다는 입장 ⓒ 정신은 그 실재내용을 얻을 수 없어 그 유무나 내용을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 있다.
ⓓ 또는 극단적으로 그런 실재내용#은 아예 전혀 없이 오직 정신이 자기분열을 통해 감각내용!을 만들어 냈다고
단정하는 입장도 생각할 수 있다.[불교의 아뢰야식설,
유식무경설 등]본 논의의 결론은 ⓒ다.
즉,
앞처럼 실재내용#을
감각내용!과 별도로 추리 설정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 실재내용#의 유무와 그 모습은 단정할 수 없다.
이는 다음 이유
때문이다.자신이 얻은 감각내용! 밖에 이를 얻게 한 실재하는 대상과 주체[#]가 있다고 가정한다.
이 실재하는 대상과 주체[#]의 내용은
무엇일까?우선 자신이 제 3자를 관찰할 때를 생각해보자.
제 3자가 얻는 감각내용[!]과 별도로 이를 얻게 한 실재내용[#]은 무엇일까.
관찰자 자신은 제 3자가 얻는 정신내용의 변화와 별개로 제 3자!와 외부대상의 모습!을 확인한다.
이들은 제 3자가 보고하는
변화와 관계없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래서 이로써 감각내용[!]의 외부에 감각내용[!]과 별개로 존재하는 외부 실재대상과 주체의 존재를
추리하게 한다.
그런데 이 때 자신이 본 외부대상[!]과 제 3자의 모습[!]이 제 3자에게 일정한 내부적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 자체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얻은 감각내용!에 불과한 것이다.
즉,
그것은 제 3자가 얻은
감각내용!에 대응한 실재내용#자체가 아닌 것이다.이제 반대로 제 3자가 자신을 관찰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제 3자는 마치 자신이 제
3자를 관찰하는 경우와 같은 해석을 하게 된다.
내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감각내용!은 사라지고 나타남을 반복한다.
이 때 내가
얻은 감각내용!은 제 3자가 직접 확인하지 못한다.
그러나 제 3자는 내 내부의 정신내용의 변화와 별도로 외부에 일정하게 유지되는 대상과
내 모습을 감각내용!으로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내게 정신내용을 얻게 한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주체[#]의 내용인가?
아니다.
그것은 제 3자의 입장에서 얻은 또 다른 감각내용!일 뿐이다.
즉,
그것은 나에게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자체의 모습은 아니다.
결국 제 3자가 본 감각내용!은 내가 얻은 감각내용!과 같은 차원의 감각내용!에 불과한 것이다.결국
자신이나 제 3자나 모두 정신내용! 외부에 있는 실재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없다.
각기 상대의 감각내용[!]과 별도로 그 외부에서
새로이 감각내용[!]만을 얻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한편 자신이 자신을 관찰할 때는 감각내용[!]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을 얻게
한 실재내용[#]은 얻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이 타인을 관찰할 때는 타인의 정신내용[!,@]을 직접 얻지 못한다.
그리고
타인[!]과 대상[!]만을 얻는다.
결국 대상#,
자신#,
타인#의 실재내용은 어느 경우에도 누구도 직접 얻지 못한다.
자신이나 제 3자나 얻는 것은 모두 관찰자들 자신이 얻은 감각내용!뿐인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실재내용#의 유무를 단정할
자료를 끝내 얻지 못한다.
더욱이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정신내용[!]과 실재내용[#]간의 관계나 상호 내용의 일치여부를 단정할 근거 역시
얻지 못한다.결론적으로 자신의 정신내용[!]을 얻게 한 실재대상과 주체[#]는 그 존재가 추리는 된다.
그런데 우리는 정신이 얻은
내용[!,@]이 있을 때 이런 내용을 얻게 만든 실재내용#을 직접 얻고자 한다.
그런데 자신이나 제 3자나 정신이 얻어낸 내용은 그런
실재내용# 자체가 아니다.
결국 자신이나 제 3자나 또 어떤 주체도 모두 이 추리에 해당하는 실재내용[#]자체를 얻어낼 길이 없다.
어떤 내용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실재내용#의 유무나 모습은 궁극적으로 그 누구도 직접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
-이 있다 -이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의 정신 내 일체의 이분법적 분별을 행할 수 없게 된다.
끝내 그
내용을 하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정신이 파악할 수 없는 것’을 파악하려 할 때 생기는 한계가 된다.불교에서는 이처럼
실재대상#과 주체#의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런 실재내용#을 끝내 얻을 수 없고[不可得] 따라서
이분법상의 분별을 행할 수 없으며[不二] 실재내용#이 이런 상태에 있음을 언어표현상 ‘공(空)하다’라고 표현한다.
이 때 ‘얻을 수
없음’ ‘불이(不二)’ ‘공’ 등의 표현은 예를 들어 꽃,
돌과 같은 외부대상#,
자신의 실재# 내용을 구할 때 공통해 얻는
실재#의 내용이나 특정한 성질#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용을 얻지 못하고 표현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기 위해 임시적으로
사용하는 언어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꽃,
돌,
나 자신의 실재내용#를 ‘얻을 수 없어’ 함께 공(空)하다고
표현하지만,
이들의 실재내용#이 공함으로서 서로 같다거나 다르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꽃과 돌이 함께 공하니,
서로
같고,
따라서 꽃은 곧 돌이고 돌은 곧 꽃이다는 식으로 분별함은 잘못이다.
이런 동가치환(同價置換)을 이 경우에는 행할 수 없다.
수학에서는 a=b c=b 일 때 동가치환을 행해서 a=c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런 동가치환이 성립하려면 역도 완전히 성립해야
한다.
수학에서는 a=b란 표현은 b=a도 의미한다.[합동] 따라서 위와 같이 동가치환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선 언어표현에서는
그런 관계가 항상 성립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예를 들어 남자는 사람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따라서 ‘남자는 곧 여자다’라고
판단하면 논리적 오류가 된다.
더욱이 공하다는 표현은 어떤 직접적 성질을 가리키는 언어표현이 아님도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a=공 b=공이라고 할 때 그 공은 어떤 의미나 값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 ]을 어떤 내용도 얻지 못함의 표시라고 할 때 a=공
b=공 등의 표현은 a=[ ] b=[ ]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값이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공이나 [ ]을 기초로 동가치환을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이라는 표현은 ‘-과 다름’을 의미하지도 않지만 적극적으로 ‘-과 같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를
이해하면 이런 관계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한편 실재내용#의 공함,
이분법적 분별을 떠난 상태임 등을 이해할 때 자칫 이를
‘하나인 어떤 무엇’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실재내용#에 대해 자칫 하나의 근본정신[根本識] 일심(一心) 일물(一物)
등과 같은 개념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어떤 내용도 얻을 수 없다는 것과 어떤 하나를 세워 이해하는 것은 서로 엄격히
다르다.
그리고 함께 다 같이 공하다라는 표현도 이들이 적극적으로 같은 한 성품 한 상태임을 뜻하는 ‘하나’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1)
따라서 결론적은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정신은 그 실재내용을 일체 얻을 수 없다는 ⓒ의 입장에 머무르게 된다.
앞에서 본 나머지 입장들은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실재내용에 대해 모두 한계를 넘어선 지나친 주장이다.정신은 일단 얻은 감각내용!과 개념내용@을 기초로 거꾸로
실재내용#를 추리한다.
그리고 이 실재내용#이 문제될 때 실재내용#를 얻지 못하므로 공하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실재내용#에 대해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와 같다 -다르다 등으로 주장하면,
이들 자체는 근거 없는 주장이 된다.
그것의 참을 입증할 자료를
하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런 주장은 결국 ‘옳다 그르다’ 어느 쪽으로도 단정할 수 없는 상태로 남는다.
그런데 자칫
이를 넘어 어느 쪽 주장의 ‘참거짓을 단정’하면,
이 부분은 오류가 된다.
참이나 거짓을 입증할 자료를 모두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가 실재내용에 대해 근거없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도 공을 주장하면서 그런 주장의 ‘거짓을
입증’하는 논증은 성립할 수 없다.
비록 상대 주장이 참인 근거는 없지만 또 반대로 거짓을 ‘단정할’ 자료 또한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2) 그러나 또 일방이 스스로 실재내용#에 대한 자신 주장의 ‘참을 단정해’ 주장함도 오류가 된다.
그 참을 입증할 자료를
하나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3) 이들 모두 주장에 대한 ‘입증 근거 없이 주장의 거짓 참을 주장하는 부분’이 오류가 된다.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실재내용#자체를 얻을 수 없어 공하다라고 표현한다고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한편 실재내용#자체를 얻지 못하므로 현상에서 얻는
감각내용이나 개념내용에 있어서의 변화과정은 얻은 정신내용의 상대적 관계로만 설명하게 된다.
참고로 이렇게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불교의
연기관계다.
이 연기관계 내용을 실재내용#에서의 관계로 오해하면 다시 위 각 주장의 혼동들과 관련된다.이제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획득내용[*]을 가져다 준 실재내용#의 존재는 획득내용[*]과 별도로 추리는 되지만,
그 내용을 끝내 얻지 못함을 보았다.
따라서
우리가 얻은 감각내용을 일으키는 실재내용으로서 대상[#]과 주체[#]는 결국 그 내용을 얻지 못하여 공(空)하다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이제
실재내용[#]과 정신내용 가운데 감각내용[!]을 살폈다.
본서가 취하는 결론은 이와 같다.
그러나 사실상 획득내용[*]의 성질 및
이와 관련하여 감각내용[!]과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다른 주장들이 있다.본서에서 이들에 대해 상세히 취급함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실제로 좋은 느낌의 발생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 모두를 이해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앞의 주장이 확실하게 옳은가,
혹시 다른 주장들이 옳지는 않은가의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앞으로 전개하는 모든 논의에서 공통적인 기초가
되어준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는 독자를 위해서 관련된 논의를 좀 더 진행한다.
다만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는
본서에서는 이 부분을 지나치고 현상의 진리론에서 좀 더 상세히 살펴봐도 무관하다고 본다.획득내용[*]에 대한 다른 주장들앞에서는
획득내용[*]이란 생소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용어가 본서에서만 사용하는 생소한 표현이므로 또 한 번 획득내용[*]의 정의(定義)를
제시해보자.
획득내용[*]은 각자가 눈을 감고 뜸에 따라 가장 1차적으로 변화하여,
얻거나,
잃어버리는 내용이다.
그렇게 획득내용[*]을 정의한 가운데 이 획득내용[*]이 어떤 차원의 내용인가에 대해 살폈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결론적으로 이런
획득내용[*]이 정신내용[감각내용!,개념내용@..] 가운데 하나로서 감각내용[!]임을 보았다.
그리고 이 감각내용[!]을 얻게 한
외부대상[#]과 주체[#]의 실재 내용[#]은 획득내용[*]과 별개로 있다고 추리하였다.
그러나 그 외부대상[#]과 주체[#]의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끝내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실재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있다,
-이 없다,
-이다,
-이 아니다,
-와 같다,
-와 다르다 등의 어떤 이분법적인 분별로도 분별할 수 없음을 보았다.
그래서 이처럼 실재내용[#]이 내용을 얻을 수 없고 분별할 수 없는 상태임을 불교에서는 ‘공(空)하다’라는 표현으로 표현하게 됨까지 살펴
보았다.
이상이 본서가 취하는 결론적 입장이다.그러나 사실상 이런 결론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획득내용[*]에
대해서는 이와는 다른 다양한 견해가 있다.
본서는 당연히 이들 견해가 잘못된 견해라고 하게 된다.그런데 다른 견해들은 대강 어떤 것들이
있으며 이들이 왜 타당하지 않은가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이하에서 이들에 대해 살핀다.우선 눈을 감고 뜸에 따라 1차적으로
변화하는 획득내용[*]이 어떤 차원의 내용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주장들이 있다.우선 ㉠ 이 획득내용[*]을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주체자신(정신)[#]으로 나눠 파악하는 입장 ㉡ 이 획득내용[*]의 본질은 그것이 외부대상이면서 또한 정신적 본질을 갖는다는 입 장 그래서 이
정신내용을 대상으로 해서 내용을 파악한다는 입장[唯心說],
또는 이 획득내용[*]은 단지 정신[識]의 내부 변화일 뿐이며 외부에
실재내용[#]은 없다는 입장[유식무경(唯識無境)-아뢰야식연기설(阿賴耶識緣起說)] ㉢ 이 획득내용[*]은 정신내용[!]이며 이 부분 밖에 실재
대상[#]과 주체[#]를 추리해 설정하는 입장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그리고 ㉢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추리한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다시 그
실재내용[#]이 ⓐ 감각내용[!]과 동일한 모습이다 ⓑ 단지 감각내용[!]과 유사한 것으로 추리된다 ⓒ 정신은 이를 끝내 얻을 수 없다는
입장들로 나눌 수 있다.본서가 취하는 결론은 ㉢ⓒ이다.
따라서 나머지 견해들에 대해서 이하에서 살핀다.획득내용[*]은 실재내용[#] 그
자체라는 입장상식적인 견해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획득내용[*]에 대해 상식적으로 갖는 판단은 본서와 같은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
내용이다.
상식적인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통해 얻는 획득내용[*]을 곧바로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 자체[#]와
자신부분[#]으로 나눠 생각한다.
그것을 자신의 정신안의 내용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이런 가장 상식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하게 살폈다.
그리고 상식적인 견해가 잘못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견해를 쉽게 갖는 이유와 또 현실생활에서
이런 잘못된 견해를 기초로 생활해도 큰 지장이 없게 되는 이유도 함께 살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어떤 잘못이 있고 왜 본서의 결론이
타당한가도 이미 살폈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시 그것을 살피지 않는다.그런데 이런 상식적 견해 외에도 여전히 상식적인 견해와 같이
획득내용[*]을 대상자체[#]와 자신[#]의 내용으로 이해하여 이론을 전개하는 입장이 있다.
그것들은 상식적인 견해가 갖게 되는 난점을
나름대로 해결하고자 구성된 이론들이다.앞에서 본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획득내용[*]을 통상 외부대상[#]과 주체[#]로 나눠 생각한다.
이것이 잘못된 생각임은 이미 보았다.
그런데 이런 통상적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단지 ② 주체가 감각내용[!]을 아예
얻지 않는다거나,
③ 주체가 얻는 감각내용[!]은 외부대상[#]에 맺힌다는 식으로 해석만 바꿀 수도 있다.
이들을 차례로
보자.투영설,
감각내용[!] 부존재설이 입장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얻게 되는 획득내용[*]을 그대로 실재대상[#]과 주체[#]로
이해한다.
이런 상식적인 해석을 기초로 한 다음 획득내용[*]을 얻고 잃는 가운데 정신은 수정(거울)처럼 전혀 변화하지 않으며,
단지 외부사물을 접촉 투영할 뿐이라고 본다.4)이 입장은 다음 해석을 취한다.
우선 주체가 눈을 뜰 때 정신적 감각내용을 얻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정신에는 단지 외부의 실재대상[#] 그 자체가 투영(投影)되어 비추일
뿐이다.
그래서 주체[#]가 눈을 떠 얻는 획득내용[*]은 실재대상[#] 그 자체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그 실재대상은
자신[#]에 투영되지 않는다.
이 때 실재대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실재대상[#]은 눈을 떴을 때 얻는 그 모습[*]
자체로 존재한다.
단지 눈을 감아 투영되는 것이 차단되기 때문에 사라진 것처럼 인식될 뿐이다.
그리고 눈을 뜨면 실재대상[#]은
눈[#]을 통해 마음에 투영(投影)되어 맺히게 된다.
따라서 눈을 떠 획득내용[*]이 나타나는 것을 투영(投影)으로 표현하고,
획득내용[*]을 실재대상[#] 자체라고 주장한다.
이는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생기는 획득내용[*]의 변화를 외부에 실재하는
내용[#]이 마음에 투영되고 않고의 차이로만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이 설은 투영을 수정구슬이나 거울을 통해 비유한다.
예를 들어
수정구슬이나 거울을 사물에 대하면 모습이 맺힌다.
이 때 수정(거울) 자체에 변화가 있거나 그 안에 어떤 내용물이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는
변화가 있다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를 비유로 들어 어떤 주체가 획득내용[*]을 얻는 것은 주체[#]가 실재내용[#]과 다른
별도의 정신내용을 얻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자 한다.
정신은 아무런 변화 없이 실재대상[#]을 비출 뿐이다.
따라서
획득내용[*]은 정신내용이 아니며 실재대상[#] 그 자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이런 주장은 상식적인 견해가 갖는 난점을 일부 해결할 수도
있다.
이는 우선 주체가 눈을 떠 얻게 된 획득내용[*]을 주체 내부의 변화내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를 인정하면,
그것을 정신내용[!]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부정하기 위해 주체에서의 변화를 일단 부정한다.
한편
상식적인 입장을 앞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제 3자가 눈을 뜨고 감음에 따라 획득내용[*]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변화를 보고한다.
그런데 이 때 관찰자는 그런 변화의 보고와 관계없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제 3자와 대상을 관찰한다.
그래서 제 3자가 보고한 변화는
제 3자의 내부에서만 일어난 정신내용의 변화로 추리한 것이다.
그런데 제 3자의 변화를 투영으로 이해하면 이런 해석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즉 제 3자가 보고한 변화는 제 3자의 정신내용에서의 변화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감관을 여닫음에 따라
외부사물[#]이 투영되고 안 되고의 차이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눈을 뜨면 정신내용자체가 변화한 것이 아니다.
외부사물자체[#]가 그대로 투영되는가 안 되는가의 변화만 갖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그러나 이 설은 다음
난점이 있다.
이 설의 주장대로 주체가 눈을 떠 얻은 내용물은 외부대상[#]자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때 주체는 도대체 어떤
변화를 하기에 외부대상[#]을 받아들이고 안하고를 반복하는가?
이것이 1차적으로 문제된다.
앞에서는 투영을 주체에서 변화가 전혀
없는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눈을 떠 투영이 될 때나 눈을 감아 투영이 안 될 때를 비교하여 주체나 정신에 아무 변화가 없다고
가정하자.
정말 그렇다면,
사실상 주체는 눈을 뜨고 감았다는 사실 이외에 투영 전후로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여야 한다.
그러나 투영이 이뤄지면 각 주체는 일정 내용을 얻고 잃는 변화를 경험한다.
따라서 자신이나 제 3자나 투영 전후를 통해 그 주체
쪽에 일정한 변화가 있었다고 추리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주체가 눈을 뜸에 따라 얻어진 획득내용[*]을 단지 외부사물[#]자체라고 이해하는
것은 난점이 있다.이를 수정의 비유로 이해하면 다음 비판이 가능하다.
물론 비유의 내용을 직접 비판하는 것은 논의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해를 위해 비유에 대한 비판을 해보자.
수정(거울)에 투영 또는 반사된 내용[모습들*]이 있다고 하자.
이 때 비유에서 수정(거울)은 아무런 실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일 투영으로 수정에 전혀 변화가
없다면,
어떤 모습이 수정에 맺혀 보이는 것도 인정할 수 없다.
그런 변화가 전혀 없다면,
어떤 돌이나 모래가 외부사물을
상대하는 경우를 비유로 들어야 한다.
돌이나 모래 따위는 어떤 변화도 없고 투영전후에 모습을 맺히는 변화도 없다.
그러나 수정은
모습을 맺히고 안 맺히고의 변화가 있다.
만일 아무 변화가 없다면,
수정은 수정의 기능을 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수정(거울)이 모습을 맺히게 할 때 수정 자체가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수정은 물체가 모습을 전달하는 과정 사이에 끼여 원
모습과 다른 또 하나의 모습을 맺히게 하는 변화를 일으킨다.
그것이 모래나 돌과 다른 차이다.
그리고 수정(거울)에 모습이 맺힐
때는 수정을 통해 보이는 모습과 별도로 수정 외부에 원래의 물체를 또 하나 보게 된다.
즉,
수정이 변화를 하던 않던,
원래의 외부물체와 다른 모습을 수정은 또 하나 비추는 것이다.
그래서 수정에서는 수정에 맺힌 모습과 외부의 원래 물체 둘을 보게
된다.
그리고 수정을 통해 맺히는 다른 모습이 바로 투영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외부 물체를 직접 바로 보는 것과 수정을 통해서
보는 것에서 차이가 있게 된다.
그런데 주체가 획득내용[*]을 얻을 때는 획득내용[*]만 얻는다.
따라서 수정에서 두 종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과 획득내용[*]의 관계가 들어맞지 않는다.
이 경우 원 외부물체와 수정을 통해 변화된 모습 가운데 무엇에
획득내용[*]을 비유한 것인지를 정할 수 없게 된다.먼저 획득내용[*]을 수정을 통해 투영 변화된 모습이라 하면 이를 외부사물자체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수정의 비유라면,
수정에 투영된 모습과 별도로 외부사물[#] 모습도 하나 더 얻어야 마땅하다.한편
획득내용[*]을 외부사물자체라고 하자.
이 경우 눈을 감아도 외부사물은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수정을 통해 투영된
모습만 사라져야 한다.
또 눈을 뜰 때는 외부사물은 그대로 있고 다시 이에 수정이 투영시켜 변화한 다른 모습을 하나 더 얻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을 관찰할 수 없다.
이 경우 자칫 개념내용을 이런 투영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오해할 수가 있다.
그래서
눈을 뜰 때 얻은 획득내용[*]은 외부사물자체이고,
개념내용[@]을 투영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정신이
얻는 감각내용은 없게 된다.
또 이런 이해에서는 눈을 감을 때 획득내용[*]이 사라지는 것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눈을 감을
때는 외부사물자체[#]는 그대로 있고 수정이 변화시킨 모습[개념내용]만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외부사물자체[#]가 사라지고 수정이
변화시킨 모습으로 본 개념내용은 사라지거나 않거나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념내용을 가지고 이에 적용하는 것도 들어맞지 않게
된다.이 설의 주장대로 수정의 투영과정을 단지 외부사물[#]의 변화내용으로 인정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이를 수정의 투영과정으로
비유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는 결국 주체가 얻은 하나의 획득내용[*]을 투영이란 모호한 용어로 외부실재내용[#]으로 보는 동시에 곧
인식된 정신내용[!]으로 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즉 하나의 동일한 획득내용[*]을 성격이 다른 두 내용 모두에 적용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또 정말 정신에 변화가 전혀 없다면,
도대체 정신이 행하는 감각작용의 의미는 무엇인가도 문제된다.감각내용 외부존재설한편
앞의 획득내용[*]이 실재대상[#] 등이라는 상식적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식적 입장이 갖는 난점을 피하기 위해 다음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즉,
외부대상에 대해 감관을 열면 외부대상[#]에 그대로 자신이 얻는 감각내용[!]이 겹쳐 하나가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이
역시 정신이 얻은 획득내용[*]을 외부 실재대상[#]으로 인정하려는 주장이다.
그리고 동시에 감각내용[!]은 이에 그대로 일치한 내용으로
맺힌다고 해석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에 의하면 하나의 획득내용[*]은 외부실재대상[#]이면서 동시에 정신이 얻은 감각내용[!]이
된다.
그런데 이 주장은 우선 주체 밖의 외부대상[#]에 주체가 얻는 정신내용[!]이 맺힌다는 이상한 주장이 된다.
한편 만일
획득내용[*]이 외부실재대상[#]이라면 눈을 감을 때 외부실재대상[#]은 그대로 남고 정신이 얻은 감각내용[!]만 사라져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주체만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을 감을 때는 외부실재대상[#]과 감각내용[!]이 함께 사라지는 결과가 나타난다.
따라서 이런 설명도 난점을 피할 수 없게 된다.획득내용[*]은 실재대상이며 정신적 본질을 갖는다는 설유심론(唯心論)앞에서 본 입장들은
획득내용[*]을 실재대상[#]으로 본다.
그리고 감각내용[!]은 없다거나,
또는 주체 밖에 있는 실재대상에 일치해 나타난다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획득내용[*]을 실재대상[#]으로 보면서 다시 그 본질이 정신적 본질[!]을 갖는다는 해석을 하는 입장도 있다.우선
이 설은 상식적 입장에서 획득내용[*]이 대상[*]과 주체[*]로 분리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또 한편 대상으로 본 내용이 사실은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낸 정신내용[!]임을 확인하게 된다.
대상으로 본 내용이 정신내용임을 확인한다면,
이를 얻게 한
실재대상[#]은 정신내용 밖에서 찾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입장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단지 다음과 같이 해석의 변경만
하는 것이다.
즉,
‘실재대상[#]’은 그 본질이 ‘정신적 존재’라는 해석만 덧붙이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 -G.
Berkeley)’라는 서양의 유심론적 해석이 이와 유사하다.이는 다음 같은 유물론적 입장에
상대된다.
즉,
유물론적 입장은 획득내용[*]을 대상[*]과 주체[*]로 나누고 이들의 본질을 물질[사물,
육체]로
간주한다.
유물론은 획득내용[*]이 물질적 본질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이들 획득내용[*]은 개념[@] 판단 등의 정신작용과
다른 물질적 본질을 갖는다고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정신 작용은 이들 물질을 기초로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입장은 이와 반대로 대상과 주체의 본질을 모두 정신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획득내용[*]이 정신적 내용임을
인정하지만,
기존의 상식적 입장에서 획득내용[*]을 실재대상과 주체로 나눠 본 구조를 변경하지는 않는 것이다.참고로 본질이 물질인가
정신인가는 획득내용[*] 밖에 실재 대상[#]과 주체[#]를 설정하는 경우,
이들에 대해서도 계속 문제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에는 무엇보다 먼저 물질과 정신의 개념이 먼저 확고하게 정의되어야 한다.
그래서 실체[$],
실재[#],
감각내용[!]
개념내용[@],
이를 얻게 한 정신작용#,
그 정신작용이 이뤄지는 기관#,
영역# 등에서 무엇을 물질이며 정신으로 보는가에
대한 개념정의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
다만 본서의 결론처럼 실재내용[#]을 얻어낼 수 없다면,
그것의 본질이 물질인지 정신인지
정할 근거는 없다.
어떤 내용도 얻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한편 앞의 주장은 다음의 난점을 갖는다.
이 설을 따르면 획득내용[*]
가운데 일부 정신내용[대상*]이 일부 정신내용[주체*]과 관계해 그들 모두가 포함된 전체 정신내용[=획득내용전체[*]]을 얻는다는 이상한 구조가
된다.
이는 기존에 대상과 주체로 본 내용을 그대로 대상과 주체로 인정하고 단지 그 본질만을 정신내용으로만 인정해 나타나는 문제다.
또 제 3자가 획득내용[*]을 얻는 과정도 해석이 곤란하다.
이 설은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안에서 대상과 주체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관찰자가 볼 때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은 제 3자 영역에 숨어서 변화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관계없이
관찰자가 관찰하는 대상[*]과 제 3자[*]는 계속 일정하게 남는다.
그래서 이들은 제 3자의 획득내용[*]과 어떤 관계에 있는
무엇인가가 문제로 남는 것이다.획득내용[*]은 정신내용이며,
실재대상은 없다는 입장유식학설(唯識學說)이 설은 지금껏 대상과 주체로 나눠
본 획득내용[*]을 정신내용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획득내용[*]을 포함하여 그 외 개념,
판단 등 모든 일체는 정신[識]이다.
그러나 이런 획득내용[*]을 얻게 한 어떤 실재대상#과 주체#는 외부에 별도로 없다[唯識無境]고 주장한다.5) 그리고 획득내용[*]이
나타난 과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들 대상[*]과 주체[*]의 모습은 모두 하나의 근본정신[根本識]이 자체 분열해 나누어진
것이다[相分,
見分].
그리고 이 내용들은 근본정신에 씨앗[種子]처럼 잠재해 있다가 분열과정을 통해 획득내용[*]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現行].
또 그것들이 사라질 때 이들은 다시 근본정신에 씨앗으로 저장된다.[熏習] 이와 같이 주장하는 것이다.이 설이
획득내용[*]을 정신적 내용으로 인정함은 일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이를 얻게 한 실재대상[#]과 주체[#]를 없다고 단정한 것은 지나친
주장이다.
우선 이 주장을 따르면 타 생명들과 타 근본정신[根本識]도 인정하기 곤란하다.
어떤 주체의 획득내용[*]에는 다른
사물[*]외에도 타 생명체들의 모습[*]이 맺힌다.
그런데 이 설은 정신에 맺힌 사물[*]에 대응한 외부 실재[#]가 없다고 부정한다.
따라서 획득내용[*]안에 파악되는 타 생명체[*]에 대응한 실재하는 타 생명체[#]는 없다고 부정해야 한다.
따라서 타 생명체들은
자신의 근본식 안에 씨앗[種子]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하면 오직 전 우주에 자신의 근본식(根本識) 하나만 있다고
해석하게 된다.그러나 만일 타 생명체도 존재하고 근본식을 갖는다고 하자.
이 경우에는 어느 일방의 근본식 외부에 별도로 실재하는 다른
근본식이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근본식 이외에 실재내용[#]은 일체 없다는 주장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만일
외부에 근본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일방의 근본식 안에 타 생명과 그 근본식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과 타 주체 가운데 누구의 근본식이 이들 모두를 포함하는 것인가.
자신은 자신의 근본식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제 3자의 입장에서는 반대로 제 3자의 근본식이 그런 것이라고 해석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들 각자의 견해를 모두 맞다고 하려면,
이제는 다시 서로가 서로를 함께 포함한다고 해야 한다.
이 경우 어느 한 주체의 근본식은 다른 주체의 근본식도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각 주체는 각기 다른 획득내용[*]을 얻는 것으로 추리된다.
그리고 서로 타 주체의 획득내용[*]을 직접
인식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이는 이상한 결론이 된다.
이제 이런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의 전체 근본식에서 각 생명체의 정신
모두가 함께 나타났다는 등의 이상한 해석도 나타난다.[如來藏說] 그러나 이 경우 각자의 획득내용[*]이 개별적으로 얻어지고 사라지는 관계를
설명하기 힘들게 된다.
그리고 이들 경우에 어떤 주체의 획득내용[*]이 사라질 때 그 획득내용[*] 밖에 다른 실재하는 대상이나 주체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주체의 획득내용[*]이 사라져도 타생명은 여전히 획득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이론은 이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한편 유식설은 근본정신[根本識,
阿賴耶識]을 기초로만 정신현상의 출현을 이해한다.
따라서 앞의
이론상 문제들이 나타난다.
또 다음 근본 문제도 있다.
정신은 정신 외부 내용을 직접 얻을 수는 없다.
그런데 유식설은
문제된 실재대상[#]을 없다라고 단정한다.[唯識無境] 그러나 ‘얻을 수 없음’을 곧 ‘없음’[無境]으로 단정함은 근거 없는 주장이 된다.
한편 유식설도 최종적으로는 삼무성설(三無性說) 등을 통해 공(空)으로 귀결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선 이
삼무성(三無性)은 정신현상과 이들 근본바탕에 대해 개념내용[@],
감각내용[!],
실체[$] 차원과 관련한 논의다.6) 즉,
상무성(相無性)은 개념내용,
생무성(生無性)은 감각내용[!] 승의무성(勝義無性)은 실체차원에 대한 논의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실재내용[#]을 문제대상으로 함이 아니다.
또 각 경우의 무(無)의 주장은 모두 공(空)과 동일시할 수 없다.
실재내용[#]을 ‘얻을 수 없어’ 공(空)함은 정신 외부에 어떤 내용이 있고 없음 어느 쪽으로도 밝히지 못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를 다른 차원 또는 실재내용[#]에 대해 ‘없음을 확인함 또는 단정함’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획득내용[*]은 감각내용[!]이며
실재내용[#]을 별도로 추리하는 입장한편 어떤 획득내용[*]을 얻을 때 이는 감각내용[!]이며 실재내용[#]은 그것과 별개로 있다고 추리할 수
있다.
앞에서는 실재내용[#]을 별도로 추리는 하지만,
그 유무,
내용 등에 대해 일체 내용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취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그 실재내용[#]을 얻은 획득내용[*] 즉,
감각내용[!]과 동일하다거나,
또는 최소한
유사하다는 식의 추리를 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을 살펴보기로 하자.실재내용[#]이 감각내용[!]과 일치된다는 추리이런 추리는 다음
이유로 많이 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제 3자를 관찰할 때는 다음과 같이 추리하게 된다.
제 3자가 얻는 획득내용[*]은 제 3
자 쪽에 숨는다.
그러나 관찰자는 그와 별개로 관찰자가 얻은 외부대상[*]과 제 3자[*]의 모습이 일정함을 관찰한다.
이 때
관찰자가 얻은 외부대상[*]과 제 3자의 모습[*]을 제 3자가 얻는 획득내용[*]에 대한 실재내용[#]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찰자가 얻은 획득내용[*]이다.
그래서 관찰자의 감각내용[!]의 본질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실재내용[#]자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를 지나치고 그것을 곧 실재내용[#]이라 추리하는 것이다.그리고 다시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을 추리한다.
이 때 제 3자가 얻은 획득내용[*]과 관찰자가 얻는 획득내용[*]은 같으리라고 추리한다.
사실
제 3자와 자신이 서로 유사한 감각기관을 가지므로 유사한 획득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이 엄밀히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지나친다.
그래서 결국 제 3자가 얻는 획득내용[*] 그리고 그것을 얻게 한 실재하는 제3자[#]와
외부대상[#]을 모두 자신의 획득내용[*]과 같다고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이들은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또 자신의 정신과정을 관찰할 때에는 다음과 같이 추리한다.
관찰자는 눈을 감고 뜸에 따라 얻어지는 획득내용[*]을 자신의
정신내용[!]이라고 정한다.
이 때 제 3자가 자신을 관찰하면 이런 자신의 획득내용[*]과 별도로 제 3 자의 획득내용[*]으로 자신의
모습[*]과 외부대상[*]을 얻게 될 것이라고 추리한다.
그리고 제 3자가 얻을 자신[*]과 외부대상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획득내용[*]에 대한 실재내용[#]일 것이라고 추리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서도 제 3자가 얻을 자신[*]과 외부대상의 모습[*]은 역시
그 본질이 제 3자가 얻는 정신내용[!]인 것이다.
따라서 역시 실재내용[#]을 얻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나치고
다시 다음의 추리를 한다.
즉 그 제 3자가 얻을 획득내용[*]은 다시 자신이 얻는 획득내용[*]과 같을 것이라고 다시 추리한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실재내용[#]이 감각내용[!]과 최소한 유사할 것이라는 추리한편 자신의
획득내용[*]을 기초로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추리하는 경우도 있다.
일정한 획득내용[*]을 얻을 때 이를 얻게 한 실재대상[#]은 자신이
얻은 획득내용[*]과 엄밀히 같지는 않아도 최소한 유사하지는 않겠는가하고 단순한 추리를 하기 쉽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음 반론이
가능하다.어떤 한 실재내용[#]을 가정하여 정하자.
그리고 이에 대해 얻는 획득내용[*]으로서 하나의 감각내용[!]은 원래
실재내용[#]과 유사할 것이라고 추리하자.
그러면 이 하나의 실재내용[#]에 대해 각기 다른 감각기관으로 감각내용[!]들을 얻을 때 이
모든 감각내용들[!]은 결과적으로 서로 모두 유사한 내용으로 얻어져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각 감관은 실재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모두 얻는 것이라고 추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기 다른 감관을 동원할 때 이들 내용은 서로 하나도 유사하지 않다.
예를 들어
시각[!],
청각[!],
냄새[!],
맛[!],
촉각[!]의 내용은 서로 하등 유사하지 않다.이들 사이에서는 어떤
공통성도 세우기 힘들다.
그렇지만 이론상 이들 각 감각을 하나의 실재대상[#]으로부터 얻은 것인지부터가 먼저 문제될 수 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실험해보자.
우선 손에 물체를 잡고 이를 시각으로 대해보자.
자신이 눈을 감고 뜸에 따라 그
모습[!]은 사라지고 나타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자신이 계속해서 손으로 물체를 잡고 있음을 촉감과 시각으로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계속 물체를 손으로 쥐고 있다면,
이 때 시각을 나타나게 실재내용[#]은 촉각[!]도 나타나게 한 동일한
실재내용[#]이라고 추리해야 된다.
즉,
동일한 실재내용[#]을 시각과 촉각이라는 다른 기관으로 대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동일한 실재내용[#]은 시각에는 일정한 모습을 주고 촉각에는 일정한 촉감을 준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내용[!]은 서로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촉각의 미끈미끈함은 시각으로 본 빨간 모습과 하등 유사하거나 비슷하지 않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실재내용[#]이 각
감관에게 자신의 실재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갖게 해준다는 추리는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다.이런 비판에 다음 반론을 할 수도 있다.
우선 하나의 실재내용[#]은 하나의 성질만을 갖지 않고 여러 성질을 골고루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과의
실재내용[#]은 빨간 모습,
사과향,
사과맛,
미끈미끈함과 같이 여러 성질이 복합된 것이라고 추리한다.
그래서 각
감관이 상대할 때는 다양하게 실재하는 성질[#] 가운데 그 감관이 얻을 수 있는 일부의 실재 성질[#]에서 그와 유사하게 감각내용[!]을
얻는다고 추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으로 사과[#]를 대하면 사과가 갖는 많은 성질[#] 중 일부분인 한 성질[#]과 유사한
감각내용으로 빨간 사과모습[!]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가설은 우리가 얻는 감각내용[!] 하나하나가 모두 실재내용[#]을 대표할
수는 없다는 한계를 스스로 미리 밝히는 것에 불과하다.
즉,
빨간 색깔은 소리,
향,
맛,
촉감을 다
대표해주지 못한다.
더욱이 실재내용과 서로 관계 맺을 수 있는 감관이나 대상은 매우 다양하다.
우리는 5감각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눈에 다양한 색깔의 안경을 써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또 다른 생명체의 다른 감각기관들도 생각할 수 있다.
또
감관은 아니지만 다른 물체들도 수없이 관계시켜 다른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사과를 유리로 만지거나,
쇠로 만지거나
하는 등으로 여러 관계와 반응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운데 어떤 한 감각내용[!]이 실재내용과 유사할 것이라는 추리는
다른 실재내용[#]을 파악하는 데 사실상 의미 없게 된다.
또 유사하리라고 추리하는 한 성질은 다른 성질들과 전혀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는 더욱 작아진다.
더욱이 그 한 성질이 극히 부분적으로라도 실재내용[#]과 유사한지 아닌지를 밝히려면 실재내용[#]을 직접
하나라도 얻어 와야 판단이 가능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실재내용[#]의 하나도 직접 얻어오지 못한다.
따라서 실재내용[#]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 -과 같다거나 -과 다르다거나 하는 판단을 일체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실재내용[#]을 다른 감각내용[!]으로 추리하는
입장어떤 획득내용[*]을 얻을 때 그것을 얻게 한 실재내용[#]을 다른 특정한 정신내용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획득내용[*]을 얻을 때 이에 대해 다른 감각기관이나 수단을 통해 별개의 내용을 정신이 얻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자칫 잘못 생각하면
그런 내용이 획득내용[*]에 대한 실재내용[#]은 아닌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색깔로 보던 물체에 대해 x선을
투시해 얻는 영상이 따로 있다고 하자.
또는 그 대상에 다른 감관 예를 들어 청각 촉각 등을 동원해 얻는 내용이 있다고 하자.
또는 소리를 들을 때 그 진동에 따라 음파를 그린 그림을 본다고 하자.
이런 경우 등에서 그런 내용을 실재내용[#]의 모습으로
추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신이 얻는 내용인 이상 또 다른 감각내용[!]이나 개념내용[@]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왜냐 하면
그것들 역시 획득내용[*]처럼 우리의 정신이 파악한 다른 내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결론획득내용[*],
그리고 감각내용[!]
실재내용[#]에 대해 여러 주장을 지금까지 살펴왔다.
상식적으로 획득내용[*]을 실재대상이나 주체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많은 이론적 문제가 발생함을 보았다.
획득내용[*]은 정신적내용으로 감각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이 때 이런 정신적
내용을 일으킨 실재내용[#]은 무엇인가가 문제된다.
유식설은 실재내용[#]을 없다고 단정한다.
또 다른 입장은 실재내용[#]을
감각내용[!]과 일치함,
유사하다고 추리됨 또는 있다 없다는 등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실재내용[#]에 대해 있고 없음,
더
나아가 얻어진 모습[!]과 일치 불일치[-이다,
아니다] 유사성[같다,
다르다]을 말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미
보았다.
실재내용[#]의 조그마한 내용도 얻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얻어올 수 없는 상태를 곧 없다라고 단정할 수 없는 사정도
이미 보았다.
특히 추리과정에서 관찰자가 얻는 획득내용[*]을 타인 정신내용 밖의 실재내용[#]으로 오해할 때,
이런 오류를 갖기
쉽다.
한편 이런 추리는 얻어진 획득내용[*] 및 다른 정신내용[개념@,
언어%..]들 사이에서도 상대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감각내용[!]은 개념내용[@] 및 언어내용[%]과 또 다른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또 여러 감각내용들 사이에서도 사정은 같다.
예를 들어 눈으로 본 내용을 손으로 대하면 질적으로 전혀 같지 않다.
또 자신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도 양쪽 상대 촉감은
서로 다르다.
이는 이들 내용을 서로 상대적 기준으로 삼을 때도 서로가 서로를 대표할 수 없음을 뜻한다.
또 이들을 모두 모아도
사정은 같다.
감관의 상태 등 각 조건이 변함과 함께 이들은 동일함을 세울 수 없다.
더욱이 이들 차원을 넘어 감각내용[!]과
실재내용[#]의 일치 불일치는 말할 수 없다.감각내용[!] 이후의 정신과정앞에서 정신내용을 얻는 가장 기초요소로서,
감각내용[!]과
실재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는 인식과정에 대한 복잡한 논의이지만,
본서에서도 각 부분에서 관련이 된다.
따라서
그 대강을 살펴보았다.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가 눈을 감았다 뜸에 따라 1차적으로 얻게 되는 내용을 획득내용[*]이라고
표현하자.
그런 경우,
이 획득내용[*]은 감각내용[!]이다.
그리고 이 감각내용[!]을 얻게 한 실재내용[#]은 그
존재가 추리되지만,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어서 공(空)하다고 표현한다.예를 들어 우리가 빛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의 감각내용[!]을 가질 때 이를 일으킨 외부 실재대상[#]과 실재주관[#] 같은 것이 있으리라 추리한다.
그리고 실재하는 외부대상[#]과 자신의 감관,
및 인식기관[#]이 관계하여 정신내용을 얻는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들
실재내용[#]은 그 내용을 직접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실재내용[#]을 기초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 된다.
즉,
그 내용을 얻을 수 없는 공(空)한 실재대상[#]과 역시 공(空)한 주관[#]이 관계하여 우리가 얻는 다양한 감각내용[!]을
얻는다라고 하게 된다.
보다 엄격히 말하면 내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대상[#]과 주체[#]를 나눠 그 관계를 제시하는 것도
곤란해진다.
그리고 이런 설명은 매우 이해하기 힘들다.따라서 통상적인 설명에서는 현상에서 감각내용[!]과 개념내용[@]들로 파악되는
요소들간의 인과관계적 설명을 취하게 된다.
획득내용[*]에서 파악된 여러 내용들 간의 상호관계로 이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어떤 상황에서 A가 있을 때[有,無,生,滅] B가 있고[有,無,生,滅] 바로 그 상황에서 A가 없으면[無,有,滅,生] B가
없는[無,有,滅,生] 관계가 파악될 때 이들 A와 B를 인과관계로 묶어 이해하는 것이다.
즉,
예를 들어 눈으로 얻은
획득내용[*] 가운데,
저 손[!]이 저 물체[!]를 움직이면 소리가 나거나 냄새가 나고 촉감을 얻는다는 식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는 눈을 뜨고 감음은 촉각으로 정하여 눈을 감고 뜰 때 시각[!]이 나타난다고 이해하는 식이다.앞에서 보듯 획득내용[*]의 본질은
감각내용[!]이다.
그런데 앞 논의를 기초로 한다면,
어떤 시각내용의 일부분[!]과 일부분[!]이 직접 작용하여 청각이나,
후각,
미각,
촉각을 낸다고 이해할 수는 없다.
이는 엄격히 설명하면 저 손[!]이 저 물체[!]를 움직일 때 그에
상응한 실재내용[#]이 다시 이런 소리[!] 이런 냄새[!] 이런 촉감[!]을 얻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정신내용 뿐이다.
그래서 이런 정신내용들에서 관계를 파악하여 묶어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설명이
인과관계적 설명이다.여하튼 우리 정신은 이런 관계에서 최초로 빛깔,
소리,
냄새,
맛,
촉감[감각!]을 화합해
얻는다.
그 다음 다시 이를 기초로 생각[관념@],
기억재생,
말,
글[%],
행위,
태도[행위],
비교,
분별[판단]을 행하게 된다.
한 주체가 이런 정신내용물을 얻는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즉 외부 대상[#] +
(매개체,빛,파장..)[#] + 자신의 감관[#] +자신의 인식기관[#] -> 감각내용[!] -> 관념내용[@] -> 언어내용%
[@->@->#->!->@->@]-> 행위[@->#->!->@] -> 분별판단내용@의
연쇄과정이다.여기서 조금 복잡하게 표현된 언어와 행위 부분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언어작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언어는
처음 어떤 관념내용@을 갖고 -> 그 관념내용을 가리키는 언어관념내용@을 선택한 다음 이를 표현할 의지를 갖고 -> 그 언어를
표현[#]하며 -> 다시 언어표현내용에 대해 감각내용[!]을 얻고,
-> 그 언어표현내용에 대해 직접 관념내용[@]을 얻은
다음 -> 언어표현이 가리키는 관념내용[@]을 얻는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꽃과 관련된 언어과정은 다음의 연쇄과정이다.
꽃@ -> kkot이라는 말소리관념내용@ -> kkot이라는 소리를 냄 -> kkot이라는 소리내용를 감각함 ->
kkot이라는 소리관념내용을 얻음 -> 꽃@의 관념내용을 얻음또 행위과정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먼저 행위 태도 등을 취하려는 의지내용@를
갖고 -> 실제 동작[#]을 하고 -> 실제 동작에 대해 감각내용[!]을 얻게 되며 -> 동작에 대한 관념내용@을 얻는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손을 들어올리겠다는 의지 -> 실제 손을 들어 올림[#] -> 손을 듦에 대한 감각내용[!] ->
손을 듦에 대한 관념내용[@]의 과정을 거친다.
즉 한 주체는 이런 연쇄과정을 거쳐 말을 하고,
동작을 하며 또 스스로 행한 말과
동작에 대해 파악을 한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이들 각 정신내용물이 기초가 되어 좋은 느낌을 얻어 갖는다.
[tr]
TO https://thegood007.tistory.com/1172 TO o:/G/G/03/ghpt/r1030.htm 참조 - 정신의 위치에
관한 논의 https://essay007.tistory.com/883
[tr] TO
https://thegood007.tistory.com/1172
TO o:/G/G/03/ghpt/r1030.htm
참조 - 정신의
위치에 관한 논의
https://essay007.tistory.com/883
정신의
위치에 관하여 사람들이 착각을 일으키는 문제를 그 동안 반복해 기술했는데 어디에서 기술했는지 찾아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가운데
하나를 찾아 제시하니 미리 논의할 내용의 대강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참고해주기 바란다.
2012년 12월 30일의 글이다
[ 펼치고 닫기 ][pa] fr
....(앞부분 생략)
○ 정신에 관한 기본적 오해는
자신이 눈을 떠 무언가를 볼 때에만
정신이 작동하고
그렇게 무언가를 보고 내용을 얻고
생각하는 어떤 신경회로의
반응을 정신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정신 안에 담기는 내용물에 해당할 뿐이고
정신은 그것이 아니다.
정신은 정신 안에 내용물이 있던 없던 일정하게
그런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그릇과 같다고 이해해야 한다.
즉 눈을 떠 세계의
모습을 얻을 때만 정신이 있다고 한다면,
눈을 감아서 모습을 얻지 못할 때는 정신이 없다가
눈을 뜰 때만 정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 안에
자신이 방금 눈으로 본 모습을 넣어둔다고 이해하게 된다.
자신을 놓고 이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신은 그대로 눈을 뜨고 사물과 다른 사람을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
다른 사람이 계속 자신처럼 눈을 뜨고 감음을 반복하면서
앞의 꽃병이 사라졌다거나 나타난다고 말을 할 때
그 사람은 무엇을 놓고 그렇게 말하는가를 음미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경우
다른 사람의 마음 안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간접적으로 뇌파를 측정하거나 혈관을 촬영한다거나 하여
이 관계를 추리하게 되는데,
여하튼 그것이 우리가 보는
제 3자의 머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자신은 계속 눈을 떠 보고 있어서
꽃병이 사라지지도 않고 계속 있는데
제 3자는 눈을 떠 나타났다고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으면 사라진다고 말을 함을 관찰하게
된다.
이럴 때 그 제 3자에게 어떤 내용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것인가가
이 문제를 푸는 처음의 단서다.
사실은
자신이 눈을 뜨고 감을 때 하는 것과 같은 일이
그 제 3자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내용은 무엇인가를 자신을 놓고
생각해보자.
바로 자신이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제 3자가 말하는 그런 내용임을 추리해 알 수 있다.
이제 그렇게 놓고
제 3자가 얻었다고 하는 내용은
그 제 3자의 어느 부분 쯤에 머무른다고 생각하게 되는가.
역시
그런 내용은 그 제 3자의 머리 안에서 일어나
머무르는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
이것이 기본적 상식이다.
그리고 또 이것이
또 하나의 판단 오류다.
여하튼 앞의 내용을 놓고
자신에게 돌아와 보자.
자신이 눈을 또 세상의 모습과 꽃병을 보게 되고
다시 감아 꽃병이 사라졌다고 할 때
그 내용은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강 제 3자가 볼 때
어느 부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게 될 것인가.
이를 제 3자를 놓고 자신이 그 제3자가 되어
거꾸로 자신을 관찰하는 입장을 가정해 놓고
추리한다면
결국 앞에서 자신이 제 3자에 대해 관찰한 것과 같은
내용을 자신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자신이 눈을 떠
보는 내용 전체와
눈을 감아 사라지는 내용 전체는
결국 자신의 머리 안에서 일어나는 내용이라고 보게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자신이 제 3자의 마음안의 내용을 직접 보지 못한다.
제 3자도 내가 마음에서 얻는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한다.
그래서 제 3자가 내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얻는 변화의 내용을
제 3자는 직접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 3자의 입장에서 내가 그런 변화가 있다고
보고해준다면,
그 제 3자는
내가 눈을 떠 본 모습 안에서
내가 생각하는 내 머리 그 부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시 이 문제를 제 3자를 놓고 내가
생각한 내용을
거꾸로 적용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결국 제 3자가 내가 눈을 감아
세상의 모습이 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또는 눈을 떠 세상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런 변화는
내가 본 세상안의 어떤 내용에서 일어나는 내용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내 마음안에서의 내용 변화일 뿐이고
그 제 3자는 이 내용 밖에서
내 모습과 내가
보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꽃병 등을 놓고
내가 얻었다가 잃어버리는 그런 내용이
일어났으리라고 추정하게 된다.
즉 이런 내용이
일어난다고 제 3자가 생각하는 그 머리라는 것은
내가 본 세계의 내용과 모습안의 어떤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것인가. 최소한
내가 본 세계의 모습을 넘어선
이런 세계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할 그런 것이란 의미다.
이렇게 놓고 보면
자신이
눈을 떠 세상의 모습을 얻을 때
그것을 얻게 한 자신의 머리나 눈은
자신이 눈을 떠 얻어낸 세상의 모습과 관계하여 추리할 때
실재로는 어느 좌표 위치쯤에 있다고 추리할 수 있는가.
일단은 자신이 얻어 놓은 세상의 모습 내용 밖이라고 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어떤 오류에 빠지는가.
이는
만일 제 3자를 놓고 볼 때
그 제 3자가 그런 내용을
얻게 된 것은
자신이 바라보는 제 3자의 눈과 꽃병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런데 이제 그 제 3자가 그런 내용은
제 3자가 눈을 떳다 감았다 할 때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한다고 하는 그런 내용안에서
찾은 제 3자가 본 어떤 꽃병과 제
3자 자신이 생각하는 눈이나
머리와 관계하여 그 내용을 얻었다고 주장하면
어떤 오류가 있다고 해야 하는가와 관련된다.
그 제 3자의 마음 안에 맺힌
그 제 3 자 자신이 얻은 꽃병의 모습과
그 제 3자 자신이 생각하고 거울을 통해
보면 보이는
그 제 3자가 생각하는 자신의 눈의 모습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잘못된
착란이듯
자신의 경우에서도 그처럼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착란이라고 봐야 한다.
즉,
자신에게 있어서도
자신이
보는 꽃병과 자신이 거울을 통해 보는 눈이
서로 관계하여
자신이 지금 보는 이 꽃병의 모습을 얻었다고
생각하거나 추리하면
앞과 똑같은 잘못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굳이 추리를 한다면
자신이 세상의 모습을 볼 때
이를 얻게 한
세상과 자신의 눈은
이 세상안에 맺혀 있는 모습과 또 거울을 통해 보는
그 자신의 눈의 모습을 통해 얻는 것은 아니라고 추리해야
한다.
굳이 대상과 자신의 눈의 위치를 추리한다면
이렇게 얻어 놓은 세상의 모습 밖에 어느 부분엔가 놓고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오류가 문제된다.
그것이 사실은 더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본 세계의 모습 밖에 추리해서 넣는
자신의 눈이나 자신의 머리
또는 꽃병의 내용
심지어 자신이 생각하는 제 3자의
머리나 눈 이런 것들을
모두 자신의 마음안에서 얻은 내용을 기초로
이 내용 그대로가
자신이 본 모습 밖에 그대로 있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얻은 내용에 비례한 무엇인가가
그렇게 위치한다고 추리하는 오류다.
그러나 여하튼 이 오류는 오류로
남겨 두고
일단 이 경우에
자신만 눈을 감아 그 꽃병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제 3자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여전히 제 3자가 바라보는 꽃병과 자신의 눈이
그대로 있음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상식이다.
그러나 이 상식도 앞의 관계로 인해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함께 알 수 있다.
자신이 일으키는
오류나
제 3자가 일반적으로 같이 일으키는 오류나
사정이 같은 것이다.
보충해서 이 오류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제 3자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제 3자의 머리 속에 얻는 모습을 놓고
그 모습안에서 내 모습과 꽃병의 모습을 놓고
이것이 서로 관계하여
내가 무언가 모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오류인 것과 같다.
내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제 3자의 마음안의 내용물 무엇과 무엇이 관계하여
지금 나 자신이 이런 모습을 본다는 것은
오류인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제 3자가 무언가를 얻는다고 할 때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
즉 제 3자는 내가 본 꽃병과
내가 본 제 3자의 눈이 서로 관계하여
그 제 3자가 그 머리 안에서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이해하거나,
나는 나대로 내가
본 꽃병과 내가 만지는 내 머리나 내 눈이 관계하여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역시
앞과 같은 오류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일단 다음과 같은 것을
정리해 낼 수 있다.
자신이 제 3자를 관찰할
때
제 3 자가 눈을 감거나 떠서 사라지거나 나타난다고 할 때
자신의 눈에 그대로 보이는
그 꽃병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일단 그것은 자신이나 제 3자가 어떤 내용을 얻는다고 할 때
그런 내용을 얻게 만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무언가와 관계하여
일단 자신의 마음안에 얻어놓게 된 내용물인 것이다.
그리고 한편
세상의 모습을 자신이 눈을 떠 얻는다고
할 때
이것은 모두
바로 자신의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물이라는 점이다.
이제 그런 세상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과 어떤
것이 관계하여
어느 부분에 맺히고 얻게 된 것인가.
굳이 말하자면
그런 것은
최소한 자신이 얻어 놓은 이들 내용
안에는
없는 것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는 다음을 생각하면 쉽다.
제 3자가 눈을 떠 꽃병을 놓고 바라볼 때
제
3자의 마음안에서 얻는 내용을 놓고
그 내용은 무엇과 무엇이 관계해 얻는 것일까 생각할 때
최소한
그 제 3자가 그 제
3자의 머리 안에
얻어 놓은 마음안 내용물들은
그것이 아니라고 봐야 하는 것과 사정이 같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본 제 3자의 눈이나
자신이 보고 있는 꽃병이 그것이다라고 하면
그것도 오류의 판단이 된다.
그것은 제
3자의 오류는 벗어나지만,
자기 입장에서는 또
자신도 제 3자가 범하는 오류를 또 범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일까를 찾는 문제는
위와 같은 내용이 답이 아니라는 것만
우선 확인하게 된다.
이것을 찾는
것이 바로
실재의 대상과 실재의 주관 그런 것의
정체를 찾아 나서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얻는 세상의 모습을 놓고
이런 내용을 얻게 한
현상내의 정신은 무엇이고
어디 쯤에 위치해 있다고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할 때는
이 세상의
모습이 얻어질 때나
얻어지지 않을 때나
그 내용이 얻어지면 그 내용을 담을 어떤 그릇과 같이 생각하고
자신이 얻어 놓은
현상안의 내용들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현상안에서 생각하는
우리의 정신과 그 위치를 대강 생각하면서
그와 관련해
현실안에서 문제되는
다음 문제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이런 현상내 정신과
그런
정신이 그 안에 세계의 모습과 같은 내용물을 얻는다고 할 때
그렇게 얻게 하는 기본 바탕이 된다고 보는
실재의 내용들
즉,
실재하는 대상과 실재하는 주체
실재하는 감각기관,
실재하는 정신
이런 것은 앞의 현상적인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 그리고 대강 여기까지가
다음의 실용적 퀴즈를 풀어내야 할 기본 단서가 된다.
우리가 쓰레기 실험을 통해서 보듯
쓰레기의 모습은 불을 태워 사라져 없어진다해도
원래 쓰레기를 구성했던 원재료 자체가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가 현상에서 대하는 재료도 그렇지만,
우리가 이 현상의 내용을 담아 놓게
되는
우리의 정신이라는 그릇도
그와 같은 기본 재료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이 정신은 우리의 생이 시작할 때
우리가
그것을 대해
우리가 '육체로 보는 그런 모습으로' 그 내용을 얻게 되는
'실재하는 육체(#)'에 얹히고 나서
이후 그
정신의 그릇안에는
그 육체의 실재내용이 외부와 관계하여 얻게 되는 내용들을
그 정신이라는 그릇안에 얻게 해줬다가 비웠다가 하는
작용을
계속하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느날 술을 마시고
자신은 좋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지만,
다음날 눈을
깨보니
병원이나 유치장에 갇혀 있음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이 원한 내용은 아니지만,
무엇때문에 그렇게 다음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가
우선 이와 관련하여 생각할 문제다.
결국 정신이란 그릇도
오늘과 내일의 관계는 그와
같은 관계로 계속 상속해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든 생명은 좋은 상태가 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각각의 뜻과
달리 다음날을 맞이해 생활하게 되는 것은
사실은 어제 또 어제의 생각과 그 생각으로 일으킨 말과 행위 등이
실재에 변화를 일으켜서
그에 대해 감각을 하고 얻는 것이 다음날 맞이하게 되는
현실의 모습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생과 생을 넘어서 이어지는
문제도
기본적으로 위와 같다고 이해해야 한다.
가정하여 만일 자신의 정신이
파리의 몸과 파리의 기관에 얹히게 되면
이후 보는 내용은 모두
원래 파리가 각 기관으로 얻고 느끼는 그런 내용과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얻는 내용과 그 주체가 생각하는 내용은
각 생명마다 다르다.
간단히 보면
사람이 보는 색깔이나 소리의 내용과
돌고래가 보고 대하는 색깔 소리나
개가 보고 대하는 색깔 소리나
박쥐가 보고 대하는 색깔 소리와 같을 수가 없다.
그것은 더 넓게 말하면
나무는 우리가 보는 데 이용하는 빛을
식사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과 관계가 엉뚱하게 달라질 수 있음도
의미한다.
알로 태어나는 생명은
알이 다음 단계의 생명으로 변화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관연하는 요소는
부모의
체온이라고 보게 된다.
생각하면 이처럼 무엇을 식사해서 자신의
몸을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데 이용하는 가는
각 생명마다
다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각 생명이 무엇을 얻고 무슨 내용을 얻는가
무엇을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도
역시 이처럼
서로 다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물인데,
어떤 이에게는 타는 불과 같이 느껴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세계를 구성하는 3가지의 내용과 관련하여
3무 3유를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어떤 문제에서
고통과 두려움만 가득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에서
벗어나고
늘 좋음만 얻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또 글이 길어서
가장 실용적인 문제에 해당한다고 보는
3유 3무의 문제는
다음으로 ~
[ ● 지옥에서의 탈출 방안 - 비상과 게송과 3유 3무 이론 -2 ]
[ ○ 정신과 대상, 그리고 생명의
변화과정에 대한 기초 내용 ]
▽
https://essay007.tistory.com/806#comment11620709
□https://essay007.tistory.com/798#comment11623727
참고
https://essay007.tistory.com/798#comment11623727
이는 최근 little님이 제기한 의문과도
관련된다.
즉 다음의 질문이다.
[ 펼치고 닫기 ]
더보기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3/10/06 14:58
자신이 본 자신의 몸의 모습, 그리고 세상의 모습이
사실은 자신의 정신이란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라고 볼 때,
이 정신이란 그릇은
자신이 본 몸의 모습에 얹혀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본 몸의 모습은 정신이란 그릇에
담긴 내용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여, 그릇에 어떤 물건을 담고
비우고 할 때
그 담고 비우는 물건에 그릇을 얹어 놓을 수는 없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lab님이 근본
정신이란 그릇이
윤회과정을 통해 다음 생의 육체에 얹혀서
다음 생의 정신이 18계의 내용을 나타낸다고 제시하는 것은
의문이
있다고 봅니다.
●정신이란 그릇이 얹히는 육체의 문제
참고
https://essay007.tistory.com/881#comment12418332
Ω♠문서정보♠Ω™[작성자]™
Lab value
◑[작성일]◐ 2013-10-08-화-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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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fl--정신의-위치에-관한-판단착오.tx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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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hegood007.tistory.com/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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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G/G/07/703-PSYC/정신의_위치에_관한_판단착오.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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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ad ]정신의 위치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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