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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나-인식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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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cz4779
◈Lab value 불기2559/04/02/목/11:09


♥ 잡담 ♥나의 정체의 논의 


○ [pt op tr] 





나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선, 
내가 나를 무엇으로 보던지 
있다고 보던지 없다고 보던지 
실재의 측면에서는 달라지는 것은 그다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 실재의 측면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희론으로서
부질없는 논의라고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사실은 망상분별의 측면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은 망상분별의 세계이다 .
그래서 이 망상분별의 세계에서 자신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보는 가가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 행위로 인해 
그런 망상분별 속에서 다음에 만나는 상태가 
그런 관계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현실의 망상세계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대단히 중요한 논의라고 해야 한다. 

한편, 이 논의는 행복론을 관통하는 핵심 논의라고 본다. 
그리고 통상적인 행복론이 추구하는 
나 자신의 행복과 최상의 상태의 추구와 실현과 같은 내용을 폐기하고 
다른 곳으로 목표를 돌려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논의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그래서 이는 더더욱 중요한 핵심 논의가 된다고 본다 .
기존 행복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한 기초논의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논의는  
현상의 진리의 문제, 그리고 철학에서 인식론 주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데카르트가 인식되는 내용이 모두 참이라고 볼 수 없기에 
모두 의문을 갖고 대하는 가운데 
가장 확실한 내용으로 cogito 아사즉아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찾아낸 것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생각한다' ' 나' '존재한다' 
이런 표현들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를 
엄밀히 따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인식의 정확성과 진리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는 것이다 .

한편 종교적 측면에서 보면 불교의 무아론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기도 하다 .
특히 삶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나아가는가, 
아니면 벗어나는가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편, 행복론 각론에서 다루는 각 수단은 
모두 그것을 바라보고 추구하는 개인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곧 그 입장에서는 '나의 정체'와 관련되는 것이다. 

나의 건강, 나의 생명, 나의 즐거움, 나의 부, 나의 명예,... 
나의 가족, 나의 국가...세계, 우주 등등으로 
아무리 다양하게 나열해도 
결국 모두 자신과 관련해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 란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가장 기초적으로 다 문제되는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갖는 기준이 바로 자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아설은 
여기에 진짜의 나와 나의 것이 없는데도 
그런데도 자신이 있다고 여기며 
이 모든 것에 집착을 갖고 대하는 
이런 망상 분별 편집 증상을 시정하지 못하면 

감각현실에서 -> 관념을 형성시키는 
그 버릇 습관 체계 때문에 
원래 그런 내용이 없는 상태에서 
윤회라고 표현하게 되는 생사와 
또 각기 다른 생명형태에서 경험하게 되는 삶의 그 모든 내용을 
망상세계에서 앞으로 무한히 경험해나게 되리라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것이 좋은 것이라면 권장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에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된다. 

지금의 망상 체계 즉, 
실재 -> '감각현실 -> 관념 형성'의 관계를 고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행해 나가면, 
다음 생에서도 그 연장선으로 
실재 -> 감각현실 -> 관념 ( 고통의 윤회)의 내용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곧  3 계 6 도에서의 무한한 고통스런 윤회의 내용이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이것은 본래는 없다고 해야 할 관계이고 내용인데 
앞의 망상환자들은 
지금 현실에서도 이렇게 보고 
다음 생에서도 또 그렇게 보고 
무한히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범부중생은 무한한 윤회를 해나가고 
깨달은 입장에서는 늘 
그런 것이 본래 없는 진여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왜 한편으로 
수행자에게는 그런 바탕에서 다시 
무한한 기간에 걸친 수행이 강조되는가. 


그것은 우선 수행자가 
수행자 자신만 고려하지 않는다는 
특수 사정 때문이다. 

실재 측면만 보면 문제가 없는데 
그러나 이들 망상체계를 기준으로 보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행복론에서 제시하는 각종  좋은 내용 즉, 
행복, 만족, 즐거움, 기쁨, 보람, 가치, 평온, 안정, 의욕 ,희망,
건강, 시간, 즐거움, ....등등을 나열하는데 
이를 외면하고 
수행을 강조하게 되는가. 

이는 그것만 보면 분명 좋다고 보게 되지만, 
이들에는 고통이 인과상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이 점이라고 본다. 

그 좋음을 붙잡는 순간 
그것에 묶인 나쁨도 같이 받아야 한다. 

이 상황에서 좋음만 받고 그에 결합된 나쁨 즉 고통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개고라는 명제가 제시된다. 
이는 현실의 삶 가운데 좋은 것은 제외하고 
나머지가 고통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일체가 다 고통이라는 의미다. 

결국 행복론에서 제시하는 좋음의 목표는 
이런 측면을 감추고 좋음을 소개하는 것이 되기 쉽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

비유하면 지금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이 순간 섬을 향해서 갈 수 있는 데 
바다의 바람 빠지는 튜브를 향해 나아가라고 
권유하거나,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다의 튜브는 물론 물에 빠진 것에 비교하면 좋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바람빠진 튜브는 결국은 물에 빠져 고통을 겪는다는 내용이 
그 안에 이미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도 함께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향해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바다의 상황을 기본적으로 보는 수행자가 
왜 이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또 왜인가. 
그것은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 수행자가 바다에 빠진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그들을 구하고자 뛰어 드는 것이다. 

어느 상황이나 실재의 측면에서는 니르바나임을 관하고 
이 측면만을 문제삼는다면, 수행자는 사실 
자신만 그런 측면으로 모든 내용을 대하고 
자신만 니르바나에 들어가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가 구제할 수 있는 
망상상태에 남아 있는 다른 이에게는 
그 차이가 큰 것이다. 

그래서 보살 수행자는 
자신의 구제만 념두에 두지 않고 
다른 중생의 구제도 념두에 두는 것이다. 

이 경우도 실재의 측면에서 본다면 
역시 문제되는 내용도 없고 구제할 바가 본래 없다고 보지만, 그
그러나 그들의 망상 세계 속의 내용을 기준으로 이를 보면 
해결해야 하는데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대단히 많다고 보게 되므로 
그런 입장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주고자 그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자는 그렇게 바다에 빠진 이들을 구제할 수 있을 정도로 
수영을 할 줄 아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수행자는 바다에 빠진 이들이 원하는 구조를 얻으려면 
사실 바다에 빠진 이들이 쉽게 하게 되는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비유하면 물에서 허우적 거리면 더 빨리 빠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행하지 않고 
남에게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탐욕을 쫒아 아끼는 것, 
다른 이가 자신을 해치면 참지 않고 
분노가 일어나는 대로 분노를 일으키고 다른 이를 해치고 
보복하는 것 
어리석음에 머물러서 삿된 견해를 일으켜 고집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위 비유에서 물에 빠져 급한 나머지 허우적 대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바다에서 좋은 상태를 얻으려면 
원래 하려고 하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행해야만 
그 망상 분별 상태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얻게 됨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먼저 행하면서 
다른 이들을 바다에서 건져내려고 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이런 노력으로 그 바다에서 큰 튜브를 지어서 
평생 마냥 거기에서 희희낙락하며 잘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으로 비춰 보이는 것은 
수행자의 사정때문이라기 보다는 
물에 빠져 망상 속에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이들의 생각이 
그렇기 때문이다.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세계도 사정이 이와 같다고 봐야 한다. 
극락세계가 너무 좋아서 거기에 도착해서 
무한히 그곳에서 평안하게 지내기 위해서 
수행자가 극락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내용들이 
결국 행복론에서 상식적으로 사람들이 좋다고 보는 그런 내용이 
갖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모든 문제가 
모두 나의 정체의 파악에서 함께 해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img2-01] 08pfl--image/존재의_영역_설명.png 



현실에는 다양한 영역의 다양한 측면이 중첩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실이 어떤 경우이던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던, 
거기에는 문제가 없다고 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위 존재의 영역에서 실재의 측면을 나타내는 부분이 우선 그렇다 .

3 # 라고 표시한 부분이다. 
참고로 이를 3 # 라고 표시한 것은 
실재가 원래 바탕이라고 할 것이지만, 
우리가 인식할 때는 그 순서가 뒤로 밀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실재 영역은 
어떤 사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던, 무엇이라고 말하던, 
어떤 사태에 처해 있던 
기본적으로 아무런 문제를 얻을 수 없다. 
고통도 생사도 생멸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지극히 청정한 니르바나의 상태라고 표현하게 된다. 
이는 세상에서 보게 되는 온갖 고통 온갖 악 온갖 문제를 
이 영역에서는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 !로 표시한 감각현실의 영역도 이에 준하게 된다 .
이는 현실에서 우리가 현상적으로 얻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말 이 감각현실만 얻는 경우에는 
여기에는 역시 앞과 같은 문제를 이 안에서 얻을 수가 없다. 


그런데 현실에는 이런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망상분별의 영역이 이런 내용과 함께 있는 것이다 .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영역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대부분 이런 관념 영역을 함께 갖고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앞과 같은 실재의 측면으로 현실을 대하면 
청정한 니르바나인데 
그러나 망상 분별 영역에서 판단하는 내용으로 대하면 
지극히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등등으로 
고통과 고뇌를 호소하게 되는 사태가 된다. 

그리고 이런 망상분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끝내 버릴 수가 없으면 
이 증상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이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집착을 일으키고 행위하면 
이 업을 통해 
다음에 만나는 상태는 
곧 그가 역시 망상 속에서 
고통으로 받아들일 도리 밖에는 없는 상황이 된다. 

그 감각현실이나 그 실재에는 
그런 내용이 없음에도 
앞의 바탕에서는 
마치 지금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는 것처럼 
그런 고통의 내용을 얻게 되는 
상황이 된다. 

그것이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이어 나갈 때 
생명이 윤회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내용들이다. 

그것이 곧 지옥-아귀-축생-인간-아수라-하늘의 
3 계 6 도의 내용이 된다. 

같은 상황을 놓고 망상분별자는 
그래서 고통의 내용이 무한히 전개되는 것을 보고 
이를 자신의 내용으로 경험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이것을 처음부터 끊고 벗어나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자신이 이 가운데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껏 나와 나의 것으로 본 것들이 
일으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치 포로가 묶인 수갑을 풀어야 탈출하고 
수용소까지 끌려가 고통을 겪지 않듯, 
수행자도 이 집착을 벗어나야 
고통의 윤회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될 수 있다. 


삼계 육도의 윤회에서 
하늘은 좋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짧은 견해인 것이다. 
이 상태가 곧 
바람빠진 튜브와 같고 
이를 목표로 할 때 
역시 고통의 윤회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마치 세상에서 돈을 추구할 때 
그로 인해 일이나 지위에 모두 묶이게 되는 것과 
사정이 같다. 


○ [pt op tr] 노래와 언어에 관련한 잡담 



○ [pt op tr] 가사 mus0fl--Graziella De Michele - Le Pull-Over Blanc.lrc




문서정보 ori  http://thegood007.tistory.com/1184#4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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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 with

http://story007.tistory.com/1047#4779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vecz4779

 


◆vcci2029

◈Lab value 불기2559/03/31/화/17:29


♥ 잡담 ♥무아설의 입장

little 님의 내용을 보았는데, 
무아설의 입장으로 혼선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일정한 감각현실 부분을 놓고 
나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 
현실의 모습이다. 

그런데 
일정한 감각현실과 그런 생각들은 
실재가 아니다. 
또 영원불변한 실체로서 진짜라고 할 나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없다. 

감각현실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은 얻을 수 없다. 

생각으로 행하는 분별 판단 등은 
관념의 영역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관념으로 분별하게 되면, 
그런 내용이  
다른 영역에도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고 
그 내용을 다른 영역에도 관통해서 적용하려는 데 
1차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집착하면 
그에 묶이게 된다.


한편, 그런 생각으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라 감각현실도 변화하고  
다시 그에 대해 분별을 행하여 나가게 된다. 

이것이 현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각 생명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려면 
일반적으로 행하는 방식을 행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중지하고 그와 반대되는 방식과 내용으로 
행해야 그것이 원만히 성취되게 된다. 

그런데 앞과 같이 집착한 상태에서는 
그렇게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일반적으로 관념으로 분별하는 그런 내용들을 
다른 영역에서 얻을 수 없음을 보지만, 
그러나,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적으로 할 때 
그런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중생들의 상태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수행방안이 그런 내용으로 제시되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현실에서 무언가 감각으로 얻는 내용도 있고 
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내용이 있을 때 

진짜의 나와 나의 것이 있는가 없는가
그런 논의를 하는 가운데 
현실에서 
무엇을 스쳐 보내고 
무엇을 중지하고 
무엇을 무시하고 돌아 나가고 
무엇을 향해 달려 나아가는가. 


현실에서 대하게 되는 내용에서 
진짜의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집착하여 추구하는 것을 중지하고, 

다른 생명들이 집착하여 추구하는 것을 
무시하고 

수행방안을 향해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집착함이 없이 
달려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자신이 행하기에 아직 적절하지 않은 수행을 
다른 이가 잘 성취하는 것을 보게 되면, 
이를 같이 기뻐하며 스쳐 지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little 님이 무아설에 관한 논의 내용을 정리했지만, 

현실에서 여러가지로 분별하게 되는 내용에 대해  
이들이 정말 실답게 다른 영역(감각현실이나 실재)에도 그대로 있는 것이다
-> 적어도 아무 것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 실답다 

이런 뉘앙스를 담으면서  
-> 현실을 그대로 실답다고 여기고 집착하면서 살아나가는 것이오히려 옳다. 
라는 결론을 이끄는데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기본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고 보지만, 
결론적으로  
이들 현실내용이 실답다. 집착하면서 살아가자 
이런 내용을 향하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점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아이들 노래 같은데 
노래 끝에 
뿡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런 소리에도 
원래의 뿡과 또 다른 별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pt op tr] mus0fl--Andrée Oriet - Un bijou de caillou.l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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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fl--나-인식의-주체.txt ☞◆vcci2029

[co] with http://story007.tistory.com/1046#2029
10gfl--2015-03월_댓글보전.txt ☞◆vcci2029

 



◆pcgd3884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5/03/31/화/12:01


♥ 잡담 ♥나의 정체에 대한 논의 

나의 정체에 대한 논의 페이지를 행복론 각론에 넣어야 한다고 해서 
찾아 보니, 시간과 나란 항목이 있고 
지혜 항목에서 인식주체로서의 나의 항목이 있다. 

구 목차에 의하면 1320 항목에서 
'나 - 인식의 주체' 라는 항목에 
조금 내용이 많이 기재되어 있다. 

목차의 변경은 자유로와졌지만, 
되도록 기존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래서 
● 나-인식의 주체 
이렇게 페이지를 만들어 볼까 생각중이다. 

그러나 페이지보다도 논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현실에서 나라고 보는 감각현실의 부분이 있고 
또 여기에 대해 나라고 생각하고 산다. 

무언가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인식되는 나라는 존재가 그런 수행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에 LAB 님의 논의가 더해지면서 
삶에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고 본다. 
도대체 어떡하라는 것인가. 
종잡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LAB 님 논의에 의하면 
나라는 존재가 분실되기 때문이다. 

진짜의 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논의는 누가 하는 것인가. 

이 혼동을 해결하기 위해서 생각해본 결과 
진짜의 나란 존재가 없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생각한다. 

우선 진짜의 나란 존재가 없다는 것이 
현실에서 얻는 내용이 전혀 없다. 
모두 허무화된다. 
이런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현실에 진짜의 나란 존재가 없던지 있던지간에 
일정한 감각현실과 관념을 현실에서 얻는다 .

그리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 감각현실의 부분에 대하여 관념을 얻고 분별을 하는 경우가 있다. 
감각현실을 얻더라도 관념을 얻거나 분별하지 않는 경우도 물론 있다. 

한편 모든 관념이 감각현실과 상응하거나, 
감각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예: 허수, 유령...etc)

일정한 관념은 
감각현실의 일정부분과 상응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 관념에는 감각현실과 일치한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양파를 놓고 대하는 사람 100 명 중에 
정확한 통계나 실험을 거친 것은 아니지만, 
98 명 정도는 양파라는 관념을 갖고 
또 이를 다른 이에게 양파라고 보고하고, 

최면 걸린 1 명 정도가 사과라고 보고하고, 
망상환자 1 명정도가 우주선이라고 보고한다고 본다.  

그래서 감각현실의 무엇과 관념의 무엇이 
상호간에 이런 관계성을 형성시키는가를 확정할 수 없다고 해도 
이렇게 나타나는 현실을 긍정해야 하는것 아닌가 생각한다. 
이 자체가 하나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인가. 

이를 lab 님은 근거가 없는 망상분별관계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여하튼 이런 망상분별의 상호관계가 현실에서는 비교적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보게 된다. 


- 한편 이 역시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감관을 열고 대하면 얻게 되는 
일정한 감각현실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주관이 관계하여 얻어진 내용이고 
실재 자체는 아니라고 하지만, 
여하튼 주관이 전혀 독단적이고 허구적으로 단독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즉, 실재 자체는 아니라도 하더라도 실재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또 그 내용을 관념으로 생각하고 
또 언어 등으로 가리킨다고 할 때 
거기에는 관념 또는 언어와 일치한 내용이 없고 
그런 내용을 얻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감각현실 영역 안에 
아무것도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관념은 아니지만, 
각 부분과 부분은 서로간에 
something special 이라고 표현할 만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되는 내용이 있다. 

정작 이들의 차이는 
관념영역에서의 인식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하지만, 
여하튼 그런 구별과 분별이 행해지는 것은 

비유하면 감각현실에 내용이 전혀 없는 백지인데 
여기에 대해 관념영역에서 
색깔을 임의로 칠해가며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감각현실이 언어나 관념에 직접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념영역에서 구분을 하고 
또 그 각 부분에 상응하는 관념을 만들어내는 바탕으로서 
감각현실안에 이미 일정한 차이 있는 내용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을 something special 이라고 표현해보게 된다. 


- 한편 현상적 내용(감각현실, 관념)이 
주관이 관계하여 얻는 내용이라고 할 때 
이런 주관이 관계하지 않는 실재의 내용을 추리할 수 있다. 

이 실재내용도 
역시 그것이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실체의 내용은 아니고 
그런 실체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그 실재 내용자체는 
직접 얻어내지 못하고 
또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같다 다르다 좋다 나쁘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의 
온갖 2 분법적인 분별을 행할 수 없고 
또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실재도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lab 님이 
진짜라고 할 나와 나의 것이 없고 
그 실재가 공하다라고 제시하여 

현실의 모든 것은 
생각하고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고, 
공허하고 허무한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lab님이 제시하는 내용은 
일반인이 인식하는 내용에서 
단지 몇몇 가지 요소만 결여된 것일 뿐 
완전히 허구적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 실재는 - 현실에서 인식하는 내용이 아니며, 공하다   

=>  그렇다고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 감각현실은 실재가 아니며, 또한 그에 대해 갖는 관념과 100 %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 그렇다고 전혀 독단적으로 허구적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며, 
또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관념구분, 분별을 행할만한 기본 바탕의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 관념은 - 감각현실을 그 안에 갖지 않는다. 

=> 그렇다고 전혀 감각현실과 무관하게 만들어 갖는 
허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 
 - 또 관념을 통해 그 의미를 알게 되고 
또 음미할 수 있게 된다. 
-  삶에서 중요한 것이다. 


lab님은 현실에서 얻는 감각과 관념을 놓고 
그것은 진짜의 나와 나의 것이 아니다. 없다. 
그런 감각현실이나 관념은 실재가 아니다. 
실재는 공하다라고 말하면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은 모두 허구적인 것이고 
마치 이는 환영과 같은 것이어서 
이를 무시하고 외면해 버려야 할 것 처럼 제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과도한 집착을 제거하여 
삶에서 발생하는 집착의 독을 제거하는 측면에서는 유효하지만, 

그러나 현실이 실답지 않음을 강조하여 
현실내용은 마치 전혀 고려할 만한 내용이 아닌 것인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측면도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무아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현실에서 내 존재가 없어져 버린 것 같은 
상실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에서 자신이 
정말 없어져 버렸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에서 나와 나의 것으로 대하고 생각하는 내용이 있을 때 
이것이 무엇인가. 
이를 그저 지나쳐야하는가. 
멈추어야 하는가, 

이를 무시하고 다른 것을 향해 돌아나가야 하는가, 
돌진해 나가야 하는가,. 


혼선이 발생한다고 본다. 

아직, 명쾌하지 않다 .
좀 더 연구를 더 깊이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작위로 올라온 노래가 
과거 유명했던 B.B 의 노래다. 
비 비, 아니다, 아니다. 그런 의미인가. 










○ [pt op tr] mus0fl--Brigitte Bardot - Serge Gainsbourg - Je T'aime...Moi Non Plus.lrc






문서정보 ori http://thegood007.tistory.com/1184#3884
03fl--나-인식의-주체.txt ☞◆pcgd3884
[co] with 
http://story007.tistory.com/1046#3884
10gfl--2015-03월_댓글보전.txt ☞◆pcgd3884

 






◆jgea5039

◈Lab value 불기2559/03/30/월/20:18


♥ 잡담 ♥진짜 나의 정체에 대하여 

우선 순위가 밀리는 일은 늘 밀리게 된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가장 우선 순위로 두는가가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을 정해준다고 본다. 

복권이 당첨되면 무엇을 하겠다는 이는 
그런 내용이 자신의 삶의 핵심 내용은 
아니라는 것도 함께 나타내는 것이다. 

반대로 복권이 당첨되거나 되지 않거나, 
내일 자신이 죽거나 죽지 않거나, 
오늘 이런 것을 하겠다고 임하는 이의 경우 
그런 내용이 곧 그의 삶의 핵심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내용을 잘 정해야 한다고 본다. 

세상에는 그런 내용이 없이 살아가는 경우도 많고 
그런 내용이 있어도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내용인 경우도 많다. 



세금을 늘 밀려서 내는 분이 있는데 
왜 어차피 낼 세금을 
늘 독촉장을 수없이 받고 
난 다음에야 내게 되는가. 


그 이유는 
삶에서 그런 내용이 
우선 순위가 밀려서라고 
생각해본다. 

본인이 회계장부를 맡은 이후로 
이런 식으로 회계장부과 금전 관련문제들을 대하다가 
결국 파산에 이른 경험이 있다. 

이는 안 좋은 측면이지만, 

다만 더 가치 있는 일을 우선순위로 두고 생활해서 
그런 결과가 벌어졌다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본다. 



나의 정체에 관한 논의 페이지를 
이곳에 만들 수도 있고 
무아설 관련 논의이기에  
불교 페이지에도 만들 수 있지만, 

결국 여러 범주에서 같이 문제되는 논의 주제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부분인 
행복론 각론페이지에 만들어야 한다고 
원칙을 정한 바 있다. 

이는 우선 순위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교의 주된 내용이지만, 
불교도만 관심을 갖는 내용이 아니고 
모든 생명이 가장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여러 사정에 의해 
little 님이 행복론 각론에 페이지를 만들기를 기다려 왔다. 

그런데 오늘 어떤 사이트를 들렀다가 
무아설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글을 올려 보았다. 

이는 지금 여기에서 논의되는 것과 
결국 같은 성격의 문제라고 보고 
관련 내용을 올린 것이다. 


다음이 그런 내용이다.  

◆anatman



*** 님의 글입니다.


:무상, 고, 무아는 삼법인입니다. 

:무아는 불교만의 주장이라고 합니다.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불교를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빅쿠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닙니다. 빅쿠들이여, 만일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이 아프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라.나의 물질이 이렇게 되지 말아라.'라고 물질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무아를 주장하는 이 문장은 납득이 잘 가지 않습니다. 물질이 나이기 때문에 아픔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온이 나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을까요? 오온이 나가 아니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

:오온이 나가 아님을 알면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겠지요. 조견고온 개공, 도일체 고액.



◈Lab value 2015/03/30/월/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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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보는 내용은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의 몸으로 보는 내용 

그리고 자신의 정신 내용과 기능으로 보는 내용들을 놓고 

이를 자신이라고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곧 색, 수, 상, 행, 식이라 할 수 있는데, 

즉, 이런 것을 놓고 현실에서는 

자기자신이라고 보게 되지만, 


그러나 그런 내용은 

진짜의 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아설의 내용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A가 어느 장소에 어느 모습으로 어느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A의 뜻에 의해서 그런 장소에 그런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 A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런 장소에 그런 모습으로 있게 한 그 무엇이 

주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에서 

진짜의 나라는 관념을 

자신의 뜻에 의해 자신의 내용을 결정해 나가는 주체라고 규정하고 생각하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은 

그런 성질을 갖는 진짜의 나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위 경전에서 제시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나를 규정하게 되는 것은 우선 

현실에서 스스로가 자신을 파악하게 되는 다음 사정때문입니다. 


우리가 눈을 떠 보면 

여기에는 평소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과 

자신 이외의 부분이라고 보는 부분이 있게 됩니다. 


낮에 눈을 감았다가 떠 보시면 

그렇게 마음에 나타나 얻게 되는 내용이 무엇인지 

스스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눈을 떠 다 자신의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인 것은 다 같은데 

왜 그 가운데 

일정한 부분만 '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인가를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 


이렇게 눈을 떠 무언가 내용을 얻고 있을 때 

현실적으로 자신이 몸을 일으켜서 어디를 가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에 따라 함께 변화해 가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내 생각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는 부분은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생각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거나 

자신의 생각과 관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은 나의 부분이 아니고 

외부 사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현실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함게 들어 온 내용 가운데 

무엇을 자신이라고 보고, 보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촉감을 동원한 구별 등 

이를 구별할 기준이 여럿 있다고 보지만, 


여하튼 

자신의 마음안에 맺힌 내용 가운데 1차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그 내용을 변화하게 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속성이

가장 기본적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별 기준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것이 다시 

'진짜의 나'에 관한 내용과 기본적으로 관련됩니다. 


간단히 말해 내 손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남의 손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남의 뜻대로 움직이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 이런 내용이 

진짜의 나를 정하는 기본 속성의 하나로 제시된다고 봅니다. 



다만, 진짜의 나라는 관념은 인용하신 경전에서는 

그와 같은 내용으로 제시되지만, 

또 다른 경전에서는 또 다른 내용도 제시되고 있다고 봅니다. 

 

이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또 다른 기준들과 관련되는 

문제로 봅니다. 



경전에서 현실이 가짜라고 하는 내용은 

현실내용이 꿈이나 아지랑이, 환영, 물에 비친달, 메아리 등등과 같다는 

등의 여러 비유적 표현으로 제시됩니다. 


이런 비유의 표현을 통해서 무엇이 실다운 것인가 진짜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구별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꿈을 왜 진실된 내용으로 보지 않는가 하면, 


꿈은 꿈을 꾸는 동안은 

그런 내용을 얻고 진실된 내용으로 생각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꿈에서 얻은 내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꿈처럼 

그 순간은 그런 내용이 얻어지더라도 

그 내용이 변화하고 일시적이어서 

상황마다 다른 내용을 얻게 되는 내용들은 

그것을 실답지 않은 내용, 즉, 가짜 거짓의 내용이라고 하게 됩니다. 


또 물에 비친 달처럼 

겉모습은 진짜와 비슷해보이지만, 

그러나 진짜에게 기대되는 내용이나 속성을 

그로부터 얻을 수 없을 때도 그것은 가짜라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의 나'라고 할 때는 

그 내용이 변화하지 않고 영원불변한 실체적인 존재인가. 

또 그것에서 진짜의 나라는 관념에서 기대되는 여러 내용과 성질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그것이 진짜인가 아닌가를 검토하게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정신으로 얻는 

우리의 몸의 모습은 

현실에서 얻지만, 

그런 속성을 갖는 것이 아니기에 

실답지 않은 내용으로서 

거기에는 진짜의 나나 나의것이 없다는 것이 

무아설의 입장입니다. [무아, 무자성] 


그러니 또 이런 실답지 않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나다 나의 것이다 등으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또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하여 

집착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해탈을 얻게 되는 기본 계기입니다. 


무엇인가 진짜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자신이 그것을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보게 되고  

또 이것이 실다운 것이라고 본다면,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켜 갖게 됩니다. 


그 후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그런 나와 나의 것에 대한 망상분별과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에 바탕하여 

생각과 말과 행위(삼업)를 일으켜서 

고통의 윤회의 결과를 맞이하고 

윤회해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 

혹(번뇌)- 업- 고의 관계입니다. 


그러니 무아아 그 실재의 공함 등을 깨닫는 것은 

기본적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얻는 계기가 된다고 봅니다. 





이런 입장에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간단히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눈,귀,코,입,몸 등을 통해 

외부 세계의 내용과 함께 자신에 관한 내용도 

얻습니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모두 

사실은 우리의 마음 안에 맺힌 내용으로서 

감각현실이고, 

그 실재의 내용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눈을 뜨면 얻게 되는 감각현실은 

눈을 감으면 방금까지 보이던 자신의 손이나 발의 모습도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눈을 감아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세상이나 자신의 실재가 이와 함께 아주 없어지게 되고 

또 반대로 눈을 떠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실재가 그처럼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를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현실에서 눈을 떠서 보게 되는 자신의 몸의 모습은 

비록 우리가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자신의 실재 모습은 이런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세계의 모습이나, 

다른 감각을 통한 내용도 사정이 모두 같습니다. 





한편 이런 내용을 그 안에 얻게 되는 

마음 자체도 

사정이 이와 같습니다 .


마음은 온 세상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도 

그 마음 안에 위와 같이 보여준다지만, 

정작 마음은 마음 자신을 직접 보거나 얻지 못합니다 .


거울이 다른 사물을 잘 비추이지만, 

정작 거울이 거울 자기 자신은 못 비추이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마음의 정체를 관하고  

그것도 안식, 이식,...등과 같이 감각과 관련되는 전 5 식과 

관념적 분별 등에 관여하는 제 6 의식을 넘어서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망상적 분별과 집착을 일으키고 

유지해가는 제 7 말나식 및 

윤회의 생사과정을 통해서도 사라지지 않고 

상속해가며 작용하는 근본의식인 아뢰야식까지

스스로 이를 관하는 것은 

경전에서는 10 지 보살조차도 잘 관할 수 없는 바라고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피상적으로 

마음 안에서 어떤 내용이 맺혔다가 사라지게 되면 

그런 변화의 내용을 자극 반응관계로 이해한 후 

그것이 곧 마음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눈을 떠 꽃을 보았는데 그 꽃을 놓고 

꽃이란 생각을 한다면, 

이런 모습을 얻는 것과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그런 것을 

곧 자신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런 감각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그런 생각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이런 작용을 떠나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마음이나, 

근본 정신의 정체를 스스로 잘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


마음은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해도 

늘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현실에서 파악하는 마음이나 정신은 

가짜의 내용이며, 

역시 진짜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됩니다. 



참고로 원각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

선남자야, 

저 중생들의 환(幻)인 몸뚱이가 멸하기 때문에 

환인 마음도 멸하고, 

환인 마음이 멸하기 때문에 환인 경계[塵]도 멸하며, 

환인 경계가 멸하기 때문에 환의 멸함도 멸하고, 

환의 멸함이 멸하기 때문에 환 아닌 것은 멸하지 않느니라. 


그것은 비유하면 마치 거울과 같아서 때가 없어지면 

광명이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몸과 마음이 다 환의 때[幻垢]이니, 

때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지면 

시방세계가 청정해진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라.

...


한편 이처럼 

우리가 현실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보는 내용이 

사실은 다 환영과 같은 그런 

가짜의 내용임을 깨닫는 것이 

수행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처음 색, 수, 상, 행, 식 이런 식으로 

그 내용을 관념하고 명칭을 붙이는 것이지만, 

이것은 이들의 진짜 정체가 아니라는 것이 

결론이 됩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이 관계하여 얻어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내용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주체의 정신(마음)이 관계하지 않고도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있다고 할 그런 실재 모습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이처럼 어떤 것의 실재 내용을 따질 때 

그런 실재 내용은 직접 얻지 못하고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등의 

온갖 이분법적인 분별로 분별을 할 수 없고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실재를 일단 표현은 해야하므로 

공이라는 표현을 빌려 이를 

임시적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 불이법 ]




그러면 '진짜 나'란 것은 이런 실재나 

또는 다른 내용들안에 있기는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처럼 '공'하다고 표현하는 실재나, 

현실에서 우리의 정신이 관계하여 얻는 감각현실이나, 

또는 이에 대해 생각하고 분별하는 내용이나, 

이 모든 것에는 

결국 진짜라고 할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불교의 무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진짜가 없다는 사정은 

나에 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것들이 같습니다.

[ 무아,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만일 실재에서 

그런 진짜의 나나 어떤 대상의 내용을 얻을 수 있다면 

실재를 공하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렇게 존재하는 진짜의 내용을 제시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고 [ 제법무아, 인무아, 법무아, 무아, 무자성, 승의무자성 ]

실재는 직접 얻을 수 없기에 공하다고 표현하게 됩니다. [일체개공]



한편, 

진짜 나의 정체를 찾는 이런 검토과정에서 

우선 삼세 윤회를 걸쳐서 상속하고 이어지는 근본정신(아뢰야식)을 

진짜 자신이라고 보기 쉽지만, 


그런 근본정신도 그런 진짜의 나는 아니며, 

진짜의 나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무아, 무자성)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입장입니다. 


비록 근본정신으로서 아뢰야식은 

삼세를 걸쳐 각기 다른 생명형태로 윤회해나갈 때 

그 각각에서 다른 정신(제 6 의식,  전 5 식 등)을 변화해 나타나게 하는 것이지만, 

이 아뢰야식도 앞과 같은 영원불변한 본체로서의 

진짜의 나는 아니라고 제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진짜의 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근본정신을 통해서 삼세 윤회가 진행되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또 아닙니다. 


이런 관계로 무아설과 윤회설은 언뜻 보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이들 내용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진짜로서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기에 

근본정신이 3계 6 도의 윤회로 변화해 가는 것이고, 


또 변화하고 윤회해 가는 것이므로 

그로써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그에 없음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설과 윤회설은 서로가 서로의  

근거가 되고 바탕이 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윤회나 무아설 공과 같은 가르침은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이나, 

화엄경 반야경 법화경 등 대승경전의 가르침이나 관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결국 현실에서 이런 색,수,상,행,식과 같은 내용을 놓을 때  

이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는 그처럼 

영원하지 않아 변화해가는 무상한 내용들을 놓고 [제행무상]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집착을 일으키고 

행위해나감으로써 

고통을 만나게 되지만,  [일체개고]



그런 내용은 우선 실재의 내용도 아니고 

실답지 않는 내용으로 있는 것이며, 

그 실재의 내용은 공하다고 표현하게 됩니다. [일체개공]


그리고 이런 현실 내용에서나, 

또 공한 실재에서나, 

'진짜의 나'라는 관념으로 기대하는 속성을 갖추고 

또한 영원불변한 본체로서 존재하는 

나나 나의 것이란 것은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제법무아]


그리고 이런 진리를 깊은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을 통해 깨닫고 

망상분별과 집착에서 벗어나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열반적정]


이런 내용이 곧 무상, 고, 무아, 열반적정, 공이라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의 내용으로서 

불교에서는 법인이라고 표현합니다. (3법인, 4법인, 5법인 등)


그리고 이런 내용은 

일체에 대해 공통적으로 성립하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위 내용 가운데 

일체가 고통이라는 측면과 

일체가 열반이라는 측면은 

언뜻 서로 모순된 내용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열반은 범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현실에 없는 것이며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증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열반이란 사실 본래 갖추어진 내용이지, 

어떤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만들어내게 되는 

그런 상태는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자신의 정신이 망상분별과 환에 덮여 있기 때문에 

갖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의 수행 등을 통해 

일체에 관한 진리를 올바로 관하게 되면 


반야심경의 내용처럼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

원리 전도몽상 구경열반

의 상태가 되는 것이고 

이런 열반의 상태는 

망상분별을 제거함으로써 

본래 있는 상태를 그렇게 있는 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런 생사나 고통의 내용이란 본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삼세를 고통 속에서 윤회해나가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정이 이렇기에 이런 윤회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얻는 좋은 상태는 

그로 인해 고통의 결과도 함께 갖게끔 묶인 것이어서 

이 일체를 다 고통으로 보게 됩니다. 

[고고, 괴고, 행고, - 일체개고]


그리고 그런 고통의 윤회의 내용이란, 또 무엇인가 하면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 

반야바라밀다를 떠나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현실의 모습으로서 

누군가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죽는 그런 모습과 

일반적으로 이에 대해 갖게 마련인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한 

생사와 생멸 그리고 

나와 나의 생명, 목숨, 기타 나의 것,  이것 저것들에 대한 가지가지 분별 

그리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행하는 행위

그리고 그런 행위가 불러 일으키는 결과들의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이 현실을 그렇게 똑같이 대하면서도 

여기에 진짜라고 할 생멸이나 생사가 본래 없음을 관하고 

집착을 벗어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부처님이 제시한 수행방안을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일체의 현실은 망상분별에 바탕하면 

그 일체가 실답지 않고 환영과 같은 내용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진짜인 것처럼 여기게 되는 고통의 현실이고 [일체개고]


반대로 깨달음에 바탕하면 그 일체가 본래 

모두 니르바나 열반의 상태인 것입니다. [열반적정]


이런 관계로 일체는 곧 범부중생에게는 일체개고가 되고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는 열반의 상태가 됩니다. 


또 그것이 앞에서 소개한 원각경에서 밝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본적인 진리를 깨달은 바탕에서 

보살 수행자가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하여 

생사윤회를 피하지 않고 

변역생사를 통해 

수행해나가는 내용에 대해서는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제시됩니다. 


즉, 

보시하는 물건이나 

제도하는 중생은 본래 얻을 수 없지만, [무아, 무자성, 공] 

그러나 현실에서 

보시와 제도를 열심히 행하는 것이 

바로 그런 수행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는 수행자가 이와 같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생사가 곧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관하고 

중생제도와 성불의 서원의 성취를 위해 

생사윤회를 피하지 않고 

행해 나가는 수행의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무아설과 관련해 이런 수행의 문제를 보면 

현실에서 무엇인가를 나라고 보고, 

그런 나의 존재, 인간, 생명, 목숨에 대한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이에 집착하면, 

결국 생사와 생멸도 그 안에서 그와 관련해 보게 되는 것이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묶이어 

윤회도 해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무아설에 입각하여 

나의 실재가 공하고 진짜의 나란 없음을 깨닫고 

현실에서 나 자신의 존재, 인간, 생명, 목숨에 대해 

갖게 되는 상을 일으키지 않고 

이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게 되면, 

그로 인해 마음의 해탈을 얻게 되고 

생사 윤회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보살 수행자는 

그렇게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한 가운데 

이후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무한한 생사를 피하지 않고 

변역생사를 통해 수행을 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는 이후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탐욕을 갖지 않고 

다른 생명을 위해 좋음을 베풀게 되고 [보시]


자신의 좋음을 위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러 침해하지도 않게 되고, [정계]


또 자신이 다른 생명으로부터 좋음을 침해받을 때에도 

이에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하게 참고 임할 수 있게 됩니다. [안인]


이런 수행덕목 등은 

그 내용이 이치상 올바르다고 생각되기에 

누구나 현실에서 마음만 가지면 쉽게 행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진짜라고 할 나와 나의 것이 없고 

이들 일체가 그 실재는 공하다는 깨달음이 바탕이 되어

기존에 갖던 나와 나의 것에 대한 분별과 집착이 

말끔히 제거가 되어야만 

원만히 성취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즉, 이론상은 그런 행위가 옳은 수행방안이라고 여긴다해도, 


실제로 자신의 신체나 재물에 대해 누구나 집착을 갖고 있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자신의 신체와 재물 등에 대해 대단히 아깝게 여기기 마련이어서 

보시를 행하여야 할 때 행하지 못하게 되기 쉽고  


또 반대로 자신의 신체와 재산을 아끼고 지키려 하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생명의 재산이나 생명도 침해하게 되고, 


반대로 자신이 집착하는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 가족 등에 침해를 받게 되면, 

그 자신은 극심한 고통과 당혹감을 느끼면서 

황망함 속에 정신을 잃거나, 

또 반대로 그런 해를 가하는 다른 생명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또 원한을 품고 보복을 가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현실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현실적으로 행하는 악한 행위반응방식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수행자가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런 무아설을 깊이 깨닫고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나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 

그리고 나의 생명, 목숨 등 

모든 다른 집착의 근본이 되는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하고 

그에 바탕하여 

앞과 같은 악한 반응방식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정이 바로 금강경에서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가리왕에 의해 손과 발이 잘리워지는 그런 상황에서 

만일 나 자신이나, 나의 목숨, 생명 등에 대한 망상분별에 바탕하여 

그런 것들에 대한 상을 갖고 있었다면, 

그런 부당한 상대의 침해에 대해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는 인욕[안인] 수행을 

원만히 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내용이 그런 내용입니다. 


결국 무아설에 입각하여 

망상분별과 집착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하며, 


그런 바탕에서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자비희사의 마음을 일으켜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바라밀다의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나가야지만, 

보살도를 닦는 수행자가  

수행의 목표를 원만히 성취해나갈 수 있다고 보게 됩니다. 





>>>
다만 사이트가 본인 관리 사이트가 아니고, 
질문과 관련해 질문과 직접 관련되지 않는 내용까지 길게 쓰다 보니 
조금 주제 넘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글을 올려 놓고 난 다음 다시 읽어 보면 
고치고 다음어야 할 내용이 무수히 발견된다는 현상은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잦은 수정은 문제가 된다고 보고 
좀 잘못된 내용이 있어도 
어느 한 곳의 수정은 더 이상 하지 않도록 
자제해야 할 것 같다. 







○ [pt op tr] mus0fl--Arno - Les Filles Du Bord De Mer.lrc



문서정보 ori http://thegood007.tistory.com/1184#5039
03fl--나-인식의-주체.txt ☞◆jgea5039
[co] with 
http://story007.tistory.com/1046#5039
10gfl--2015-03월_댓글보전.txt ☞◆jgea5039
 




◆defe6125
◈Doctr Gong 2015/04/01/수/17:58


● 논점

]]]]        ♥> 인식의 주체 및 대상


이에 대한 실험 검증은 
항상 이글을 읽는 자기 자신이 가장 훌륭한 실험 주체 및 대상이 된다. 

- 나와 타 외부 
- 참고 
- 논의의 체계상 위치

일반 인식론 - 철학
대상의 현실론 
본질론 
- 자연과학 - 현상의 진리론

 행복론상 
 행복의 주체 객채 대상
 행복의 실현 주체 객체 대상

각론 일반론상  욕구의미 
- '나'의 건강, 쾌, ... 나의 외부 물질 생명의 지배

]]]]]       □> 나 - 인식의 주체
 동의어 - 아(我) 자아(自我) 자신(自身) 주체(主體) self

]]]]]]      ■> 개념 
 - 외부 객체 남 대상을 인식하는 요소 (그 무엇) 및 그 결합체?
 - 인식의 주체 - (이것은 인식을 떠나서 파악 될 수 없으므로 )
 - 인식의  주체가 스스로 인식하는 인식의 주체 자신
 - 인식의 주체가 타 생명의 인식 기능을 인정할 때 
( 타 주체의  인식 내용을 직접 알 수 없는 한계성) 

(일반적으로 그 인식 내용의  귀속체 (타아? 타 생명의 ㅣ내부) - 이것 역시 남, 객체일 뿐임



 - 객관적인 나 ; 
인식 대상과 대립하는 인식기능을 수행하고 
인식 내용이 귀속되는 영역

  
]]]]]]      ■> 개념 요소

일단 이 글을 쓰는 자신의 구성요소
감각
마음
판단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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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fl--나-인식의-주체.txt ☞◆defe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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