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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 value 불기2559/04/02/목/11:09 |
○ [pt op tr]
○ [pt op tr] 노래와 언어에 관련한 잡담 ○ [pt op tr] 가사 mus0fl--Graziella De Michele - Le Pull-Over Blanc.lrc |
문서정보 ori http://thegood007.tistory.com/1184#4779
03fl--나-인식의-주체.txt ☞◆vecz4779 http://story007.tistory.com/1047#4779 10gfl--2015-04월_댓글보전.txt ☞◆vecz4779 |
◈Lab value 불기2559/03/31/화/17:29 |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진짜의 나와 나의 것이 있는가 없는가 ○ [pt op tr] mus0fl--Andrée Oriet - Un bijou de caillou.lrc |
문서정보 ori http://thegood007.tistory.com/1184#2029 |
◈Prince evilstupidmiserable Little 2015/03/31/화/12:01 |
○ [pt op tr] mus0fl--Brigitte Bardot - Serge Gainsbourg - Je T'aime...Moi Non Plus.lrc |
문서정보 ori http://thegood007.tistory.com/1184#3884 |
◈Lab value 불기2559/03/30/월/20:18 |
*** 님의 글입니다. :무상, 고, 무아는 삼법인입니다. :무아는 불교만의 주장이라고 합니다. 무아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불교를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빅쿠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닙니다. 빅쿠들이여, 만일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이 아프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라.나의 물질이 이렇게 되지 말아라.'라고 물질에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무아를 주장하는 이 문장은 납득이 잘 가지 않습니다. 물질이 나이기 때문에 아픔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온이 나이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을까요? 오온이 나가 아니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 :오온이 나가 아님을 알면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겠지요. 조견고온 개공, 도일체 고액. ◈Lab value 2015/03/30/월/19:21 >>> >>>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보는 내용은 현실에서 자신이 자신의 몸으로 보는 내용 그리고 자신의 정신 내용과 기능으로 보는 내용들을 놓고 이를 자신이라고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곧 색, 수, 상, 행, 식이라 할 수 있는데, 즉, 이런 것을 놓고 현실에서는 자기자신이라고 보게 되지만, 그러나 그런 내용은 진짜의 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아설의 내용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A가 어느 장소에 어느 모습으로 어느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A의 뜻에 의해서 그런 장소에 그런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 A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실은 그런 장소에 그런 모습으로 있게 한 그 무엇이 주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에서 진짜의 나라는 관념을 자신의 뜻에 의해 자신의 내용을 결정해 나가는 주체라고 규정하고 생각하면, 현실에서 자신이라고 보는 내용은 그런 성질을 갖는 진짜의 나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내용이 위 경전에서 제시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나를 규정하게 되는 것은 우선 현실에서 스스로가 자신을 파악하게 되는 다음 사정때문입니다. 우리가 눈을 떠 보면 여기에는 평소 자신이 자신의 몸이라고 보는 부분과 자신 이외의 부분이라고 보는 부분이 있게 됩니다. 낮에 눈을 감았다가 떠 보시면 그렇게 마음에 나타나 얻게 되는 내용이 무엇인지 스스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눈을 떠 다 자신의 마음안에 들어온 내용인 것은 다 같은데 왜 그 가운데 일정한 부분만 '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인가를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 이렇게 눈을 떠 무언가 내용을 얻고 있을 때 현실적으로 자신이 몸을 일으켜서 어디를 가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에 따라 함께 변화해 가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내 생각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는 부분은 나의 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생각과 관계없이 그대로 있거나 자신의 생각과 관계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은 나의 부분이 아니고 외부 사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현실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함게 들어 온 내용 가운데 무엇을 자신이라고 보고, 보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촉감을 동원한 구별 등 이를 구별할 기준이 여럿 있다고 보지만, 여하튼 자신의 마음안에 맺힌 내용 가운데 1차적으로 자신의 뜻에 따라 그 내용을 변화하게 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속성이 가장 기본적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별 기준이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것이 다시 '진짜의 나'에 관한 내용과 기본적으로 관련됩니다. 간단히 말해 내 손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남의 손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남의 뜻대로 움직이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1차적으로 이런 내용이 진짜의 나를 정하는 기본 속성의 하나로 제시된다고 봅니다. 다만, 진짜의 나라는 관념은 인용하신 경전에서는 그와 같은 내용으로 제시되지만, 또 다른 경전에서는 또 다른 내용도 제시되고 있다고 봅니다.
이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또 다른 기준들과 관련되는 문제로 봅니다. 경전에서 현실이 가짜라고 하는 내용은 현실내용이 꿈이나 아지랑이, 환영, 물에 비친달, 메아리 등등과 같다는 등의 여러 비유적 표현으로 제시됩니다. 이런 비유의 표현을 통해서 무엇이 실다운 것인가 진짜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구별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꿈을 왜 진실된 내용으로 보지 않는가 하면, 꿈은 꿈을 꾸는 동안은 그런 내용을 얻고 진실된 내용으로 생각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꿈에서 얻은 내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꿈처럼 그 순간은 그런 내용이 얻어지더라도 그 내용이 변화하고 일시적이어서 상황마다 다른 내용을 얻게 되는 내용들은 그것을 실답지 않은 내용, 즉, 가짜 거짓의 내용이라고 하게 됩니다. 또 물에 비친 달처럼 겉모습은 진짜와 비슷해보이지만, 그러나 진짜에게 기대되는 내용이나 속성을 그로부터 얻을 수 없을 때도 그것은 가짜라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의 나'라고 할 때는 그 내용이 변화하지 않고 영원불변한 실체적인 존재인가. 또 그것에서 진짜의 나라는 관념에서 기대되는 여러 내용과 성질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측면에서 그것이 진짜인가 아닌가를 검토하게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정신으로 얻는 우리의 몸의 모습은 현실에서 얻지만, 그런 속성을 갖는 것이 아니기에 실답지 않은 내용으로서 거기에는 진짜의 나나 나의것이 없다는 것이 무아설의 입장입니다. [무아, 무자성] 그러니 또 이런 실답지 않는 내용을 놓고 그것이 나다 나의 것이다 등으로 망상분별을 일으키고 또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하여 집착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해탈을 얻게 되는 기본 계기입니다. 무엇인가 진짜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자신이 그것을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보게 되고 또 이것이 실다운 것이라고 본다면, 이런 망상분별에 바탕해 집착을 일으켜 갖게 됩니다. 그 후 이런 망상분별과 집착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그런 나와 나의 것에 대한 망상분별과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번뇌에 바탕하여 생각과 말과 행위(삼업)를 일으켜서 고통의 윤회의 결과를 맞이하고 윤회해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 혹(번뇌)- 업- 고의 관계입니다. 그러니 무아아 그 실재의 공함 등을 깨닫는 것은 기본적으로 망상분별과 집착을 벗어나 해탈과 열반을 얻는 계기가 된다고 봅니다. 이런 입장에서 현실에서 얻는 내용을 간단히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눈,귀,코,입,몸 등을 통해 외부 세계의 내용과 함께 자신에 관한 내용도 얻습니다. 그러나 이들 내용은 모두 사실은 우리의 마음 안에 맺힌 내용으로서 감각현실이고, 그 실재의 내용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눈을 뜨면 얻게 되는 감각현실은 눈을 감으면 방금까지 보이던 자신의 손이나 발의 모습도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눈을 감아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세상이나 자신의 실재가 이와 함께 아주 없어지게 되고 또 반대로 눈을 떠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실재가 그처럼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를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현실에서 눈을 떠서 보게 되는 자신의 몸의 모습은 비록 우리가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자신의 실재 모습은 이런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세계의 모습이나, 다른 감각을 통한 내용도 사정이 모두 같습니다. 한편 이런 내용을 그 안에 얻게 되는 마음 자체도 사정이 이와 같습니다 . 마음은 온 세상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도 그 마음 안에 위와 같이 보여준다지만, 정작 마음은 마음 자신을 직접 보거나 얻지 못합니다 . 거울이 다른 사물을 잘 비추이지만, 정작 거울이 거울 자기 자신은 못 비추이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마음의 정체를 관하고 그것도 안식, 이식,...등과 같이 감각과 관련되는 전 5 식과 관념적 분별 등에 관여하는 제 6 의식을 넘어서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망상적 분별과 집착을 일으키고 유지해가는 제 7 말나식 및 윤회의 생사과정을 통해서도 사라지지 않고 상속해가며 작용하는 근본의식인 아뢰야식까지 스스로 이를 관하는 것은 경전에서는 10 지 보살조차도 잘 관할 수 없는 바라고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피상적으로 마음 안에서 어떤 내용이 맺혔다가 사라지게 되면 그런 변화의 내용을 자극 반응관계로 이해한 후 그것이 곧 마음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눈을 떠 꽃을 보았는데 그 꽃을 놓고 꽃이란 생각을 한다면, 이런 모습을 얻는 것과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그런 것을 곧 자신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그런 감각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그런 생각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이런 작용을 떠나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마음이나, 근본 정신의 정체를 스스로 잘 파악하지 못하게 됩니다 . 마음은 그런 내용을 얻지 못해도 늘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현실에서 파악하는 마음이나 정신은 가짜의 내용이며, 역시 진짜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됩니다. 참고로 원각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 선남자야, 저 중생들의 환(幻)인 몸뚱이가 멸하기 때문에 환인 마음도 멸하고, 환인 마음이 멸하기 때문에 환인 경계[塵]도 멸하며, 환인 경계가 멸하기 때문에 환의 멸함도 멸하고, 환의 멸함이 멸하기 때문에 환 아닌 것은 멸하지 않느니라. 그것은 비유하면 마치 거울과 같아서 때가 없어지면 광명이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몸과 마음이 다 환의 때[幻垢]이니, 때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지면 시방세계가 청정해진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라. ... 한편 이처럼 우리가 현실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보는 내용이 사실은 다 환영과 같은 그런 가짜의 내용임을 깨닫는 것이 수행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현실에서 어떤 내용을 얻을 때 처음 색, 수, 상, 행, 식 이런 식으로 그 내용을 관념하고 명칭을 붙이는 것이지만, 이것은 이들의 진짜 정체가 아니라는 것이 결론이 됩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이 관계하여 얻어내는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내용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주체의 정신(마음)이 관계하지 않고도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있다고 할 그런 실재 모습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이처럼 어떤 것의 실재 내용을 따질 때 그런 실재 내용은 직접 얻지 못하고 있다 없다 이다 아니다 -과 같다 -과 다르다 깨끗하다 더럽다 등등의 온갖 이분법적인 분별로 분별을 할 수 없고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실재를 일단 표현은 해야하므로 공이라는 표현을 빌려 이를 임시적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 불이법 ] 그러면 '진짜 나'란 것은 이런 실재나 또는 다른 내용들안에 있기는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처럼 '공'하다고 표현하는 실재나, 현실에서 우리의 정신이 관계하여 얻는 감각현실이나, 또는 이에 대해 생각하고 분별하는 내용이나, 이 모든 것에는 결국 진짜라고 할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불교의 무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진짜가 없다는 사정은 나에 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것들이 같습니다. [ 무아, 인무아, 법무아, 승의무자성] 만일 실재에서 그런 진짜의 나나 어떤 대상의 내용을 얻을 수 있다면 실재를 공하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렇게 존재하는 진짜의 내용을 제시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고 [ 제법무아, 인무아, 법무아, 무아, 무자성, 승의무자성 ] 실재는 직접 얻을 수 없기에 공하다고 표현하게 됩니다. [일체개공] 한편, 진짜 나의 정체를 찾는 이런 검토과정에서 우선 삼세 윤회를 걸쳐서 상속하고 이어지는 근본정신(아뢰야식)을 진짜 자신이라고 보기 쉽지만, 그런 근본정신도 그런 진짜의 나는 아니며, 진짜의 나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무아, 무자성)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입장입니다. 비록 근본정신으로서 아뢰야식은 삼세를 걸쳐 각기 다른 생명형태로 윤회해나갈 때 그 각각에서 다른 정신(제 6 의식, 전 5 식 등)을 변화해 나타나게 하는 것이지만, 이 아뢰야식도 앞과 같은 영원불변한 본체로서의 진짜의 나는 아니라고 제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진짜의 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근본정신을 통해서 삼세 윤회가 진행되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또 아닙니다. 이런 관계로 무아설과 윤회설은 언뜻 보면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이들 내용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진짜로서 영원불변한 본체가 없기에 근본정신이 3계 6 도의 윤회로 변화해 가는 것이고, 또 변화하고 윤회해 가는 것이므로 그로써 진짜라고 할 영원불변한 본체가 그에 없음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설과 윤회설은 서로가 서로의 근거가 되고 바탕이 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윤회나 무아설 공과 같은 가르침은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이나, 화엄경 반야경 법화경 등 대승경전의 가르침이나 관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결국 현실에서 이런 색,수,상,행,식과 같은 내용을 놓을 때 이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는 그처럼 영원하지 않아 변화해가는 무상한 내용들을 놓고 [제행무상] 자신이나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집착을 일으키고 행위해나감으로써 고통을 만나게 되지만, [일체개고] 그런 내용은 우선 실재의 내용도 아니고 실답지 않는 내용으로 있는 것이며, 그 실재의 내용은 공하다고 표현하게 됩니다. [일체개공] 그리고 이런 현실 내용에서나, 또 공한 실재에서나, '진짜의 나'라는 관념으로 기대하는 속성을 갖추고 또한 영원불변한 본체로서 존재하는 나나 나의 것이란 것은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제법무아] 그리고 이런 진리를 깊은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을 통해 깨닫고 망상분별과 집착에서 벗어나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열반적정] 이런 내용이 곧 무상, 고, 무아, 열반적정, 공이라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의 내용으로서 불교에서는 법인이라고 표현합니다. (3법인, 4법인, 5법인 등) 그리고 이런 내용은 일체에 대해 공통적으로 성립하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위 내용 가운데 일체가 고통이라는 측면과 일체가 열반이라는 측면은 언뜻 서로 모순된 내용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열반은 범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현실에 없는 것이며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증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열반이란 사실 본래 갖추어진 내용이지, 어떤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만들어내게 되는 그런 상태는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자신의 정신이 망상분별과 환에 덮여 있기 때문에 갖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의 수행 등을 통해 일체에 관한 진리를 올바로 관하게 되면 반야심경의 내용처럼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 원리 전도몽상 구경열반 의 상태가 되는 것이고 이런 열반의 상태는 망상분별을 제거함으로써 본래 있는 상태를 그렇게 있는 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런 생사나 고통의 내용이란 본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망상분별과 집착을 바탕으로 삼세를 고통 속에서 윤회해나가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정이 이렇기에 이런 윤회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얻는 좋은 상태는 그로 인해 고통의 결과도 함께 갖게끔 묶인 것이어서 이 일체를 다 고통으로 보게 됩니다. [고고, 괴고, 행고, - 일체개고] 그리고 그런 고통의 윤회의 내용이란, 또 무엇인가 하면 지금 당장의 현실에서 반야바라밀다를 떠나 일반적으로 보게 되는 현실의 모습으로서 누군가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죽는 그런 모습과 일반적으로 이에 대해 갖게 마련인 망상분별을 바탕으로 한 생사와 생멸 그리고 나와 나의 생명, 목숨, 기타 나의 것, 이것 저것들에 대한 가지가지 분별 그리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행하는 행위 그리고 그런 행위가 불러 일으키는 결과들의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이 현실을 그렇게 똑같이 대하면서도 여기에 진짜라고 할 생멸이나 생사가 본래 없음을 관하고 집착을 벗어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부처님이 제시한 수행방안을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일체의 현실은 망상분별에 바탕하면 그 일체가 실답지 않고 환영과 같은 내용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진짜인 것처럼 여기게 되는 고통의 현실이고 [일체개고] 반대로 깨달음에 바탕하면 그 일체가 본래 모두 니르바나 열반의 상태인 것입니다. [열반적정] 이런 관계로 일체는 곧 범부중생에게는 일체개고가 되고 깨달음을 얻은 이에게는 열반의 상태가 됩니다. 또 그것이 앞에서 소개한 원각경에서 밝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본적인 진리를 깨달은 바탕에서 보살 수행자가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하여 생사윤회를 피하지 않고 변역생사를 통해 수행해나가는 내용에 대해서는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제시됩니다. 즉, 보시하는 물건이나 제도하는 중생은 본래 얻을 수 없지만, [무아, 무자성, 공] 그러나 현실에서 보시와 제도를 열심히 행하는 것이 바로 그런 수행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는 수행자가 이와 같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생사가 곧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관하고 중생제도와 성불의 서원의 성취를 위해 생사윤회를 피하지 않고 행해 나가는 수행의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무아설과 관련해 이런 수행의 문제를 보면 현실에서 무엇인가를 나라고 보고, 그런 나의 존재, 인간, 생명, 목숨에 대한 망상분별을 일으켜서 이에 집착하면, 결국 생사와 생멸도 그 안에서 그와 관련해 보게 되는 것이고 그런 망상분별과 집착에 묶이어 윤회도 해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무아설에 입각하여 나의 실재가 공하고 진짜의 나란 없음을 깨닫고 현실에서 나 자신의 존재, 인간, 생명, 목숨에 대해 갖게 되는 상을 일으키지 않고 이에 대해 집착을 제거하게 되면, 그로 인해 마음의 해탈을 얻게 되고 생사 윤회의 묶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보살 수행자는 그렇게 생사가 곧 열반임을 관한 가운데 이후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무한한 생사를 피하지 않고 변역생사를 통해 수행을 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바탕에서 수행자는 이후 자신과 자신의 것에 대한 탐욕을 갖지 않고 다른 생명을 위해 좋음을 베풀게 되고 [보시] 자신의 좋음을 위해 다른 생명이 집착하는 좋음을 함부러 침해하지도 않게 되고, [정계] 또 자신이 다른 생명으로부터 좋음을 침해받을 때에도 이에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하게 참고 임할 수 있게 됩니다. [안인] 이런 수행덕목 등은 그 내용이 이치상 올바르다고 생각되기에 누구나 현실에서 마음만 가지면 쉽게 행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진짜라고 할 나와 나의 것이 없고 이들 일체가 그 실재는 공하다는 깨달음이 바탕이 되어 기존에 갖던 나와 나의 것에 대한 분별과 집착이 말끔히 제거가 되어야만 원만히 성취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즉, 이론상은 그런 행위가 옳은 수행방안이라고 여긴다해도, 실제로 자신의 신체나 재물에 대해 누구나 집착을 갖고 있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망상분별과 집착을 제거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자신의 신체와 재물 등에 대해 대단히 아깝게 여기기 마련이어서 보시를 행하여야 할 때 행하지 못하게 되기 쉽고 또 반대로 자신의 신체와 재산을 아끼고 지키려 하기 때문에 함부로 다른 생명의 재산이나 생명도 침해하게 되고, 반대로 자신이 집착하는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 가족 등에 침해를 받게 되면, 그 자신은 극심한 고통과 당혹감을 느끼면서 황망함 속에 정신을 잃거나, 또 반대로 그런 해를 가하는 다른 생명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또 원한을 품고 보복을 가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현실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현실적으로 행하는 악한 행위반응방식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수행자가 수행을 원만히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런 무아설을 깊이 깨닫고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나 자신에 대한 망상분별 그리고 나의 생명, 목숨 등 모든 다른 집착의 근본이 되는 망상분별을 제거해야 하고 그에 바탕하여 앞과 같은 악한 반응방식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정이 바로 금강경에서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가리왕에 의해 손과 발이 잘리워지는 그런 상황에서 만일 나 자신이나, 나의 목숨, 생명 등에 대한 망상분별에 바탕하여 그런 것들에 대한 상을 갖고 있었다면, 그런 부당한 상대의 침해에 대해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 평안히 참는 인욕[안인] 수행을 원만히 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내용이 그런 내용입니다. 결국 무아설에 입각하여 망상분별과 집착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하며, 그런 바탕에서 얻을 것이 없음(무소득)을 방편으로 자비희사의 마음을 일으켜 중생제도와 성불을 목표로 보시-정계-안인-정진-정려-반야-방편-원-력-지바라밀다의 수행을 원만히 성취해나가야지만, 보살도를 닦는 수행자가 수행의 목표를 원만히 성취해나갈 수 있다고 보게 됩니다. >>> 그리고 글을 올려 놓고 난 다음 다시 읽어 보면 ○ [pt op tr] mus0fl--Arno - Les Filles Du Bord De Mer.lr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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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6125
◈Doctr Gong 2015/04/01/수/17:58 |
]]]] ♥> 인식의 주체 및 대상 이에 대한 실험 검증은 항상 이글을 읽는 자기 자신이 가장 훌륭한 실험 주체 및 대상이 된다. - 나와 타 외부 - 참고 - 논의의 체계상 위치 일반 인식론 - 철학 대상의 현실론 본질론 - 자연과학 - 현상의 진리론 행복론상 행복의 주체 객채 대상 행복의 실현 주체 객체 대상 각론 일반론상 욕구의미 - '나'의 건강, 쾌, ... 나의 외부 물질 생명의 지배 ]]]]] □> 나 - 인식의 주체 동의어 - 아(我) 자아(自我) 자신(自身) 주체(主體) self ]]]]]] ■> 개념 - 외부 객체 남 대상을 인식하는 요소 (그 무엇) 및 그 결합체? - 인식의 주체 - (이것은 인식을 떠나서 파악 될 수 없으므로 ) - 인식의 주체가 스스로 인식하는 인식의 주체 자신 - 인식의 주체가 타 생명의 인식 기능을 인정할 때 ( 타 주체의 인식 내용을 직접 알 수 없는 한계성) (일반적으로 그 인식 내용의 귀속체 (타아? 타 생명의 ㅣ내부) - 이것 역시 남, 객체일 뿐임 - 객관적인 나 ; 인식 대상과 대립하는 인식기능을 수행하고 인식 내용이 귀속되는 영역 ]]]]]] ■> 개념 요소 일단 이 글을 쓰는 자신의 구성요소 몸 감각 마음 판단 행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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